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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 우크라이나 흔드는 푸틴, 진짜 노림수는 소련의 영광 재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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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 1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회견에 참석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AP=연합뉴스]

지난 1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회견에 참석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AP=연합뉴스]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서방과 러시아의 갈등이 벼랑 끝으로 향하고 있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1일 “우크라이나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해 (2014년 러시아와 러시아계가 각각 차지한) 크림반도와 돈바스(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을 무력으로 탈환하려 시도하면 나토와 전쟁할 수밖에 없다”고 대놓고 ‘전쟁’을 언급했다. 모스크바를 방문한 헝가리의 오르반 빅토르 총리와 회담하면서 “미국은 러시아의 안전보장 요구를 무시했다”고 비난하면서다. 하지만 “여전히 대화는 열려 있다”고 말해 출구는 열어뒀다.

푸틴의 요구는 크게 세 가지다. 나토 확장 중단과 러시아 국경 인근에 공격용 무기 배치 금지, 그리고 유럽 군사 인프라의 1997년 이전 복귀다.

나토 확장 중단은 러시아와 서남쪽 국경을 맞댄 우크라이나와 남부 캅카스에 접경한 조지아의 가입을 금지하는 문서를 달라는 의미다. 나토는 헌장 10조에서 가입을 개방하고 있다. 이를 금지하라는 요구는 나토의 원칙을 뒤흔드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물론, 앞으로 어떤 나라든 공동 방위를 내세운 나토에 기대 러시아에 대항하지 못하게 하라는 요구나 진배없다.

지난달 23일 촬영돼 지난 1일 공개된 이 위성사진에는 크림반도에 집결한 러시아군 군용 차량이 잡혔다. [AFP=연합뉴스]

지난달 23일 촬영돼 지난 1일 공개된 이 위성사진에는 크림반도에 집결한 러시아군 군용 차량이 잡혔다. [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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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용 무기 배치 금지는 얼핏 모스크바의 안보를 위한 것으로 보이지만 뜯어보면 사정은 다르다.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폴란드·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등에 미사일을 비롯한 주요 무기체계를 배치하거나 대규모 기동훈련을 금지해 나토의 동쪽 경계를 군사력 공백지대로 만들라는 요구나 다름없다.

특히 폴란드는 나토 회원국에서 최다 기갑 전력을 보유하고 러시아의 일격에 대비하는 파수꾼이다. 러시아를 경계할 수밖에 없는 역사를 가진 폴란드는 99년 체코·헝가리와 함께 옛 사회주의권에서 가장 먼저 나토에 가입했다.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는 40년 소련이 점령해 반세기 동안 지배했다. 결국 푸틴의 요구는 생존을 위해 나토를 찾아간 동유럽 국가들에 ‘공동 방위’라는 회원국 권리를 주지 말라는 압박이다.

유럽 군사 인프라를 97년 이전으로 돌리라는 요구는 푸틴의 야심을 반영한다. 형식적으로는 나토와 러시아가 97년 서로 존중하기로 합의하고 맺은 ‘상호 관계·협력·안보 기본법’ 체제로 복귀하자는 요구다. 하지만 실질적으론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뒤 유럽과 미국이 가한 경제제재의 해제를 요구한 것으로 풀이된다. 달리 말하면 러시아를 미국·나토와 동등한 글로벌 세력으로 인정하라는 요구다. 결국 우크라이나 위기의 이면엔 미국·나토 일극시대를 청산하고 러시아를 옛소련 시절 위상으로 복귀시켜 역사를 새로 쓰려는 푸틴의 계획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자신감의 배경에는 군사력이 자리 잡고 있다. 소련 붕괴 뒤 체첸 전쟁(1999~2009)과 조지아 전쟁(2008)에서 제대로 힘을 보이지 못한 러시아군은 2008년 대대적인 개혁에 들어갔다. 후임병에 대한 가혹 행위인 ‘데보브쉬나’로 악명 높았던 러시아군은 2007~2008년 징병제에서 징병·모병 혼합형으로 전환했다. 징집병 복무기간을 2년에서 1년으로 줄이고, 모병 응모자에겐 합리적인 보수를 지급했다. 공수군·전략미사일군은 병력을 모병으로만 충당해 전문성을 높였다. 지휘체계를 단축하고, 작전 재량권을 사령부에서 현장 부대로 대거 이양했다. 26만 병력의 육군은 대부분 보병·기갑·포병에 헬기 공중강습부대, 대공·대전차·지대지 미사일에 정보·의무·보급 부대가 통합된 독립 여단으로 재편됐다.

미국의 F-15 전투기가 1일 러시아와 접경한 발트해 연안국가에서 열린 훈련에 참가하고 있다. 러시아는 나토의 공격용 무기 철수를 요구한다. [EPA=연합뉴스]

미국의 F-15 전투기가 1일 러시아와 접경한 발트해 연안국가에서 열린 훈련에 참가하고 있다. 러시아는 나토의 공격용 무기 철수를 요구한다. [EPA=연합뉴스]

뉴욕타임스(NYT)는 러시아군이 현대화를 통해 위협적인 군대로 변신했다고 지난달 27일 지적했다. 우크라이나 국경에 유도미사일을 장착한 T-72B3 전차를, 흑해의 수상함과 잠수함에는 최대 사거리 2500㎞의 칼리브르 순항미사일을, 국경지대엔 회피기동으로 유명한 이스칸데르-M 미사일을 각각 배치해 전 세계에 힘을 과시하면서 푸틴의 중요한 외교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동안 나토의 유럽 국가들은 미국에 안보를 맡기고 군비 축소에 열중했다. 주요 유럽 회원국인 영국·프랑스·독일의 경우 주력 전차 보유 대수가 각각 200대 정도에 불과하지만 러시아는 2840대를 운용한다. 모스크바는 착실하게 신무기를 개발해 배치하고 구식 장비를 개량했으며 군 시스템을 혁신해왔다.

게다가 핵보유국인 러시아는 재래식 전력과 더불어 강력한 사이버 전력과 가짜뉴스를 앞세운 기만전·선전전 능력을 확보한 것으로 평가된다.  미 국무부는 러시아가 국영 국제방송인 RT와 인터넷 다국어 매체인 스푸트니크를 역선전전에 동원하고 있다고 최근 지적했다.

문제는 나토의 허점을 노려 기회는 잡았지만, 국력과 재정이 부족해 러시아의 영광 재현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점이다. 러시아의 국내총생산(GDP)은 2021년 국제통화기금(IMF) 명목금액 기준 1조6475억 달러로 세계 11위다. 10위인 한국(1조8238억 달러)과도 차이가 작지 않다. 1인당 GDP는 1만1273달러로 말레이시아(1만1125달러)나 중국(1만1891달러)과 비슷해 전 세계 중간값 정도다. 1억4500만 명의 국민을 만족시켜야 할 푸틴이 처한 딜레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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