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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팔고, 논 팔고, 집 팔아 땅끝 마을 소년을 PD로 만든 어머니 [인생 사진 찍어드립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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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독자 서비스 '인생 사진 찍어드립니다'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기억과 추억,
그리고 인연을
인생 사진으로 찍어드립니다.
아무리 소소한 사연도 귀하게 모시겠습니다.

'인생 사진'은 대형 액자로 만들어 선물해드립니다.
아울러 사연과 사진을 중앙일보 사이트로 소개해 드립니다.
사연 보낼 곳: https://bbs.joongang.co.kr/lifepicture
             photostory@joongang.co.kr
▶12차 마감: 2월 28일

눈 내린 아침 아들과 어머니는 옛 집터를 찾았습니다. 물속에 잠긴 지 오래인 집터를 둘러보는 어머니를 아들이 뒤에서 안았습니다. 그 순간 어머니 얼굴에 따뜻한 미소가 번졌습니다.

눈 내린 아침 아들과 어머니는 옛 집터를 찾았습니다. 물속에 잠긴 지 오래인 집터를 둘러보는 어머니를 아들이 뒤에서 안았습니다. 그 순간 어머니 얼굴에 따뜻한 미소가 번졌습니다.

한장의 사진으로 어머니에게 90년 마음의 빚 갚고 싶습니다.

저는 땅끝 해남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대흥사를 품은 두륜산 뒤 옥천면 용동마을이 고향인데
동막골보다 깊은 동네였습니다.

두륜산에서 내려다본 용동마을 풍경입니다. 산으로 둘러싸인 논과 밭 그리고 저수지가 한반도 모양입니다.

두륜산에서 내려다본 용동마을 풍경입니다. 산으로 둘러싸인 논과 밭 그리고 저수지가 한반도 모양입니다.

그런 제가 최근 책을 한 권 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경험하기 힘든
두메산골의 삶을 기록해 두고 싶었습니다.
제목이 'PD가 된 땅끝 소년'입니다.

책을 쓰다 보니 제 얘기보다
어머니와 관련된 일들이 많다 싶을 정도였고,
자연스럽게 어머니에 대해
생각하게 됐습니다.

논 다섯 마지기와 산밭이 전부인 농사였지만,
끼니를 거를 정도로
어려운 생활은 아니었습니다.
오순도순 즐거웠던 날들도 있었습니다.

한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술이었습니다.

나이 40 넘어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는 아버지는
마시면 취했고 싸웠습니다.
그러면 우린 옆집으로 피해야 했고
아버지가 잠드는 새벽녘에야 집에 돌아갔습니다.

아버지의 술은 나날이 심해져
농약을 한다는 것이
제초제를 뿌리는 바람에
나락이 벌겋게 타버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든
막내인 저를 공부시켜
월급쟁이라도 만들어야 한다는 게
마지막 희망이었습니다.

하지만 태풍과 홍수 등
자연재해까지 반복돼 희망은 점점 멀어지는 듯했고,
결국 병으로 눕고 말았습니다.

전 재산이랄 수 있는 소를 팔아
겨우 병원비를 마련했지만,
더는 입원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퇴원하자 사경을 헤매다
마침내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때 저는 눈앞이 캄캄했고,
절망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으로
퍼져갔습니다.

제가 운이 없지는 않아
어머니는 다시 깨어났습니다.
저를 두고 그냥 갈 수는 없었던 모양입니다.

어머니의 무서운 의지와 노력으로
저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게 됐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극렬하게 반대하는 아버지를 설득해
서울로 이사 왔고,
노점에서 나물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가끔 길 가다가 어머니를 보면
몹시 불편했습니다.
그럴 때면 모른 척
그냥 지나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한겨울 어느 날이었습니다.
용돈이 없어 어머니한테 들렀던 저는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습니다.
손등이 다 터져
피가 줄줄 흐르는 어머니 손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일생 어머니가 막둥이를 맘에 품었듯 이젠 아들이 어머니를 품습니다. 어머니와 아들은 그렇게 서로를 품습니다.

일생 어머니가 막둥이를 맘에 품었듯 이젠 아들이 어머니를 품습니다. 어머니와 아들은 그렇게 서로를 품습니다.

나물 장사 특성상
어머니는 꽁꽁 언 얼음물에 쉬지 않고
손을 담가야 했던 것입니다.

그날 이후 저의 죄책감은 심해졌고
죄송한 마음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늦게나마 방송국에 취직해
'최소한 월급쟁이는 만들어야겠다'는
어머니의 소원을 풀어드렸다는데
만족하는 정도입니다.

그러던 지난해 봄에는
어머니가 입원하게 됐습니다.
별일 아닌 듯했는데
날이 길어졌고
한 달 후 다시 뵈니
얼굴이 너무 많이 상해 있었습니다.

책을 쓴다는 핑계로
자주 뵙기는커녕
최소한의 의무만
다하고 있었던 것 같고
어머니를 살갑게 대한 적도 없었던 듯합니다.

한데 더 안타깝고 죄스러운 것은
급격히 쇠약해진 어머니의 얼굴을 보니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는 점입니다.

그런 어머니가 올해 90세가 되셨습니다.
더 늦기 전에
어머니와 사진 한 컷 찍어서
남겨두고 싶습니다.
그렇게라도 하면
마음의 빚을 좀 갚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제 마음과 다르시네요.
사진을 찍고 싶어 하긴 하시는데
저하고 찍는 것보다는
영정사진을 찍고 싶어 하시네요.

어머님 속내를 알고 나니
저는 더더욱 어머님과 함께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김병진 올림


저수지 뒤로 우뚝 솟은 산이 두륜산입니다. 어린 시절 집에서 보던 바로 그 풍경을 배경으로 어머니와 아들이 섰습니다. 30년만입니다.

저수지 뒤로 우뚝 솟은 산이 두륜산입니다. 어린 시절 집에서 보던 바로 그 풍경을 배경으로 어머니와 아들이 섰습니다. 30년만입니다.

사연을 보낸 김병진 씨가
나고 자란 고향을 찾았습니다.
어머님과 함께
모처럼 고향 나들이 나선 겁니다.

그들의 고향은 해남에서도
오지로 소문난 곳이었습니다.
하물며 그가 살았던 마을은 이미 사라졌습니다.
물속에 잠긴 지 오래였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옛 집터를 찾은 아들이 어머니 손을 꼭 잡고 걷습니다. 고된 장사로 인해 손등이 터져 피가 줄줄 흘렀던 어머니의 손, 아들에겐 세상 무엇보다 고마운 손입니다.

어머니와 함께 옛 집터를 찾은 아들이 어머니 손을 꼭 잡고 걷습니다. 고된 장사로 인해 손등이 터져 피가 줄줄 흘렀던 어머니의 손, 아들에겐 세상 무엇보다 고마운 손입니다.

사라진 집터와 마을 앞에서 김병진 씨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여기 사실 당시 어머니는
동네 부녀회장을 몇 번이나 하셨어요.
워낙 예쁘기로 소문나신 데다가
사람을 끄는 매력이 출중하셨죠.
이 근동에서 유명하셨어요.”

이에 질세라 어머님이 아들 자랑에 나섰습니다.
“우리 막둥이가 어릴 때부터 남달랐어요.
그래서 남들이 애기들 고등학교를 해남으로 보낼 때
나는 우리 막둥이를 광주로 보냈어요.
광주서 고등학교를 1학년 댕기고 나니께,
담임 선생이
“너는 자취하지 말고 우리 집에 들어와 하숙하라”며
데려가 버렸어요.
우리 막둥이가 공부도 잘하고
맘에 차게 했던가 봐요.”

모자가 용동분교 터를 찾았습니다. 어머니의 자랑이 이어집니다. ″우리 막둥이가 공부를 참 잘했어. 착하기도 참 착했지.″ 어머니에게 막둥이는 아무리 해도 넘치지 않는 자랑 그 자체입니다.

모자가 용동분교 터를 찾았습니다. 어머니의 자랑이 이어집니다. ″우리 막둥이가 공부를 참 잘했어. 착하기도 참 착했지.″ 어머니에게 막둥이는 아무리 해도 넘치지 않는 자랑 그 자체입니다.

어머니는 말마다 아들을
“우리 막둥이”라 칭했습니다.
그만큼 어머니에게 대견한 아들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어머니에게 해남에서
서울로 이사한 연유를 물었습니다.
“사실 우리 막둥이를 면장 시키려고 공부시켰는데,
공부를 잘하더라고….
대학을 광주로 가라고 했더니 싫다며
서울로 가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길로 서울로 가자고 했죠.
소 팔고, 논 팔고, 집 팔아서 서울로 가서
시장에 뛰어들어 장사를 시작한 거지.
우리 막둥이 아버지가
여기를 절대로 안 떠나려 했는데
어떻게든 가르치러 떠난 거지.”

첩첩산중 두메산골 땅끝 마을 땅을 팔아 서울로 간 어머니 덕에 막둥이는 방송국 PD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PD가 된 아들은 어머니에겐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자랑입니다.

첩첩산중 두메산골 땅끝 마을 땅을 팔아 서울로 간 어머니 덕에 막둥이는 방송국 PD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PD가 된 아들은 어머니에겐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자랑입니다.

어머님 당신이 그렇게 장사해서 가르친 아들은
방송국 PD가 되었습니다.
KBS 라디오 대표 프로그램이었던
〈안녕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를 시작으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이주노, HOT의 강타,
신화의 신혜성 등이 진행한 청소년 대상
음악 오락 프로그램을 오랫동안 연출했습니다.

어머니는 난생처음 두륜산에 올랐습니다. 아흔이 되고서야 막둥이와 함께 오른 겁니다.

어머니는 난생처음 두륜산에 올랐습니다. 아흔이 되고서야 막둥이와 함께 오른 겁니다.

어머니와 아들은 케이블카를 타고
두륜산에 올랐습니다.
거기서 옛 마을을 살펴볼 요량이었습니다.
용이 승천하는 모습이라고 붙여진 이름인 용동리를
한번 내려다볼 심산이었습니다.

이날 어머니는 난생처음 두륜산에 오른 겁니다.
일곱 아이를 가르치고 먹이느라
그 흔한 나들이 한번 못한 겁니다.
눈 뜨면 바라보이던 두륜산,
아흔이 되어서야 당신의 막둥이와 함께 오른 겁니다.

대흥사로 가는 길에서 모자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었습니다. 예서 나물 팔고 기도하며 살아낸 이유가 바로 일곱 자식이었습니다.

대흥사로 가는 길에서 모자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었습니다. 예서 나물 팔고 기도하며 살아낸 이유가 바로 일곱 자식이었습니다.

이어 두륜산이 품은 대흥사도 찾았습니다.
어머니는 대흥사 입구에서 나물을 팔기도 했으며,
아이들을 위해 기도도 했습니다.

뿌리가 서로 엉겨 붙은 아름드리 연리근(連理根) 느티나무와 함께 선 어머니와 아들, 둘은 마음이 엉겨 붙은 연리인(連理人)으로 보였습니다.

뿌리가 서로 엉겨 붙은 아름드리 연리근(連理根) 느티나무와 함께 선 어머니와 아들, 둘은 마음이 엉겨 붙은 연리인(連理人)으로 보였습니다.

대흥사에 뿌리가 서로 엉겨 붙은
연리근(連理根) 느티나무가 있습니다.

그 아름드리나무와 함께 선 어머니와 아들,
그 나무와 모자는 꼭 닮은 듯했습니다.
어쩌면 둘은 마음이 엉겨 붙은
연리인(連理人)일 겁니다.

설입니다.
독자 여러분,
고운 설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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