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Focus 인사이드] 지평리에 대한민국 생존 걸었다…中 인해전술 격파한 용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951년 1월 15일 실시한 울프하운드 작전을 통해 보급에 어려움이 많은 중공군의 약점을 파악한 미 8군 사령관 리지웨이는 중부전선에 집결한 공산군 주력을 섬멸하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1월 4일 서울을 재점령한 후, 한 달 이상 제자리에 머물며 부대 재편 중이던 공산군도 중부전선에서 새로운 공세를 예정하고 있었다. 결국 홍천에서 횡선에 이르는 축선은 거대한 전장으로 바뀔 운명이었다.

1월 31일 공세에 나선 아군은 전선을 30㎞ 이상 북상시켰다. 이때 좌익을 담당하던 미 2사단 23연대도 2월 3일 양평군 지평리를 점령했다. 하지만 공산군이 구정 직후인 2월 11일 이른바 제4차 공세를 시작하자 전황은 반전됐다. 삼마치 고개에서 국군 8사단이 붕괴하면서 전선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자 결국 아군은 열흘 전의 진격로를 뒤돌아 후퇴에 나섰다. 이때 지평리에 주둔한 미 23연대도 여주로 원위치하려 했다.

1951년 1월 31일, 유엔군 공세 당시의 전선 상황도. 중부전선을 중심으로 전선을 30킬로미터 정도 북상시키는데 성공했으나 공교롭게도 중공군도 같은 곳으로 공세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이때 지평리가 전쟁의 명운을 가를 결전의 장소가 되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1951년 1월 31일, 유엔군 공세 당시의 전선 상황도. 중부전선을 중심으로 전선을 30킬로미터 정도 북상시키는데 성공했으나 공교롭게도 중공군도 같은 곳으로 공세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이때 지평리가 전쟁의 명운을 가를 결전의 장소가 되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하지만 이곳을 포기하면 전선 전체에 악영향을 준다고 판단한 리지웨이가 현지 사수를 명령했다. 그런데 중공군도 한강 남단까지 올라온 서부전선의 유엔군을 압박하려면 지평리를 차지해야 했다. 그렇게 지평리는 대한민국의 생존을 건 역사적 전투가 벌어질 장소가 됐다.

지평리는 역을 중심으로 약 16㎞에 이르는 고지들이 둥글게 휘감은 분지다. 이곳을 방어하려면 능선에 원형방어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러나 4개 대대 5600여 명의 병력만으로 진지편성이 불가능하자 미 23연대장 프리만(Paul L. Freeman) 대령은 과감히 고지를 포기하고 지평역을 중심으로 반경 1.6㎞의 구릉과 논둑을 연결한 총 길이 6㎞의 원형 진지로 방어선을 대폭 축소했다. 그리고 다량의 지뢰를 매설한 바로 뒤에 참호를 파고 병력을 전면 배치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한마디로 죽음을 각오한 저항을 준비한 것이었다.

미국 육군 23연대에 배속되어 지평리 전투에서 무공을 세운 프랑스 대대원들. 좌측의 몽클라르 대대장은 스스로 중장에서 중령으로 계급을 강등하고 참전한 역전의 용장이다. 이들 이외에 카투사도 대단한 활약을 펼쳤다. 김성수씨 제공

미국 육군 23연대에 배속되어 지평리 전투에서 무공을 세운 프랑스 대대원들. 좌측의 몽클라르 대대장은 스스로 중장에서 중령으로 계급을 강등하고 참전한 역전의 용장이다. 이들 이외에 카투사도 대단한 활약을 펼쳤다. 김성수씨 제공

2월 13일 밤이 되자 중공군은 꽹과리를 두드리며 공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프리만은 심리전에 휘말리지 않고 유리한 곳까지 적이 다가올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렸다. 마침내 적이 사거리에 들어오자 포병대대가 중공군을 강타했다. 하염없이 중공군이 무너졌으나 탄막을 뚫고 접근한 일부가 진지를 넘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군은 착검하고 뛰어나갔다. 특히 미 23연대에 배속된 카투사와 프랑스대대의 분전은 경이적이었다.

반면 전력이 앞선다고 생각에 만용을 부린 중공군은 실책을 연발했다. 이번 공세에 동원된 4개 연대가 각기 다른 4개 사단에서 별도로 동원되었던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동서남북으로 지평리를 포위하였음에도 서로 협조하여 공세를 가하지 않고 중구난방으로 공격하다가 차례대로 격파돼 나갔던 것이다. 덕분에 방어선 중심에 배치된 포병대대는 그때그때 돌아가며 사방으로 포탄을 날릴 수 있었다.

참전 용사들이 대거 참가한 가운데 2010년에 지평리 현지에서 있었던 전투 재현 행사. 뉴시스

참전 용사들이 대거 참가한 가운데 2010년에 지평리 현지에서 있었던 전투 재현 행사. 뉴시스

하지만 군수과장이 전사하고 프리만도 부상했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우세한 중공군의 첫날 공세는 거셌다. 그런데도 프리만은 후송을 거부하고 지휘를 계속했다. 2월 14일 새벽, 적의 공격이 재개되었으나 결과는 대동소이했고 시간이 갈수록 중공군의 시신이 산을 이루어갔다. 2월 15일 02시경에는 중공군이 G중대가 담당하던 진지를 붕괴시켜 위기가 고조되었으나 인접 부대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돌파구 확대를 막아내었다.

그리고 그날 17시 30분 미 제1기병사단 5연대를 주축으로 구성된 구원부대가 악전고투 끝에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지평리에 도착하면서 전세는 반전되었다. 결국 날이 밝자 지평리를 포위한 중공군은 사라져 버렸다. 강철 같은 방어막에 가로막혀 공세 여력을 상실하자 밤새 철수해 버린 것이었다. 사살된 중공군이 4946구였던 반면 아군은 52명의 전사자와 259명의 부상자, 그리고 42명의 실종자만 발생한 대승이었다.

4배가 많은 적에게 포위된 미 23연대는 불굴의 의지로 저항에 나서 역사적인 대승을 거두었다. 이는 아군이 중공군의 참전 이후 계속되어 온 트라우마를 깨뜨린 출발점이 되었다. 미 전쟁사 센터

4배가 많은 적에게 포위된 미 23연대는 불굴의 의지로 저항에 나서 역사적인 대승을 거두었다. 이는 아군이 중공군의 참전 이후 계속되어 온 트라우마를 깨뜨린 출발점이 되었다. 미 전쟁사 센터

한국전쟁 최초로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완벽하게 격파한 이 대승은 많은 전훈을 남겨주었다. 중공군의 공세는 5일 이상 지속하기 힘들므로 비록 포위당해도 화력과 공군력을 믿고 저항한다면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된 것이다. 이 승리를 통해 사기를 회복한 아군은 중공군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보다 적극적으로 반격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1951년 구정 무렵의 지평리는 암울했던 대한민국을 구한 역사의 장소가 됐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