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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날린 중거리 한방에…文 ‘평화 프로세스’ 결국 원점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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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지난 2017년 8월 북한이 발사한 중장거리전략탄도미사일 화성-12형. 북한이 30일 쏜 미사일도 중거리탄도미사일로, 화성-12형 제원과 흡사하다. 연합뉴스

지난 2017년 8월 북한이 발사한 중장거리전략탄도미사일 화성-12형. 북한이 30일 쏜 미사일도 중거리탄도미사일로, 화성-12형 제원과 흡사하다. 연합뉴스

북한이 30일 중거리탄도미사일(IRBM)급 미사일을 발사했다. 북한이 엄포를 놨던 모라토리움(핵실험 및 장거리탄도미사일 시험발사 유예) 파기에 한 발 더 다가가면서 문재인 대통령이 임기 내 공을 들였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도 사실상 원점으로 돌아가게 될 가능성이 커졌다.

2017년 이후 최장거리 미사일

합동참모본부에 따르면 이날 북한이 오전 7시 52분쯤 북한 자강도 무평리 일대에서 동쪽 동해 방향으로 발사한 미사일의 비행 거리는 약 800㎞, 고도는 약 2000㎞였다. 제원대로라면 2017년 발사한 화성-12형과 흡사하다. 미국령 괌 타격이 가능한 무기로, 북한이 2017년 11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15형 시험발사 뒤 2018년 4월 스스로 모라토리움을 선언한 이후 발사한 최장거리 미사일로 볼 수 있다.

북한이 올 들어 사나흘에 한 번꼴로 미사일을 발사하고, 지난 19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주재로 연 노동당 중앙위 정치국 회의에서는 모라토리움 파기 검토를 결정하면서 ‘2017년 어게인’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북한은 2017년 핵실험과 함께 미사일 발사만 24차례 감행했다.

이런 우려가 현실화한다면 이는 곧 2018년 2월 평창 겨울 올림픽을 시작으로 남‧북‧미 간 연쇄 정상회담으로 이어졌던 문 정부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대한 ‘사망 선고’나 다름없다.

文 “모라토리움 파기 근처” 위기감 

이런 위기감을 반영한 듯 문재인 대통령이 이날 직접 청와대 국가안보회의(NSC) 전체회의를 주재했다. 문 대통령의 전체회의 주재는 지난해 1월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에 따른 외교‧안보 현안 점검 이후 처음이다.

이후 북한의 거듭된 미사일 도발에도 서훈 국가안보실장이 주재하는 NSC 상임위원회 회의 차원에서 대응했다. 이날은 대통령이 직접 나선 것 자체가 이번 발사를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뜻이다.

지난해 1월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이후 처음으로 30일 북한의 중거리탄도미사일 발사에 대응하기 위한 NSC 전체회의를 주재했다. 연합뉴스

지난해 1월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이후 처음으로 30일 북한의 중거리탄도미사일 발사에 대응하기 위한 NSC 전체회의를 주재했다. 연합뉴스

청와대에 따르면 문 대통령도 전체회의에서 “2017년도에 중거리탄도미사일 발사에서 장거리탄도미사일 발사로 이어지면서 긴장이 고조되던 시기와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며 ‘2017년 어게인’을 우려했다. 또 “중거리 탄도미사일 발사라면 모라토리움 선언을 파기하는 근처까지 다가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바, 관련 사항들을 염두에 두고 논의하기 바란다”고 지시했다.

곧이어 열린 NSC 상임위원회는 북한의 IRBM 발사에 대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대한 도전으로서 이를 규탄한다”고 밝혔다.

드디어 등장한 ‘규탄’…‘도발’은 없어

‘규탄’은 연이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도 ‘우려’ ‘유감’ ‘깊은 유감’ ‘매우 유감’ 등 유감만 반복했던 그간의 입장에서 한 발 더 나아간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조차 대통령이 직접 한 게 아니라 NSC 상임위원회가 발표하는 형식을 취했고, 이번에도 역시 ‘도발’이라는 규정은 없었다.  

청와대가 밝힌 문 대통령의 발언 중 북한을 향한 직접적 메시지는 “북한은 긴장 조성과 압박 행위를 중단하고 한‧미 양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대화 제의에 호응할 것을 촉구한다” 정도였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지만, 대북 관여와 대화를 핵심에 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정신은 끝내 포기하지 못하는 청와대의 고민이 묻어나는 부분이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하지만 2018년 남북 간 4‧27 판문점 선언과 같은 해 북‧미 간 6‧12 싱가포르 공동성명, 같은 해 9‧19 남북 간 평양 공동선언 등은 북한의 갖은 도발로 사실상 무력화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판문점 선언의 산물이었던 개성 공동연락사무소는 북한이 지난 2020년 6월 폭파했고, 북한이 평양 공동선언에서 조건부이긴 하지만 영구적 폐기를 약속한 영변 핵시설은 버젓이 다시 돌아가고 있다. 싱가포르 공동성명에 명시된 북‧미 간 새로운 관계 수립 약속도 물 건너간 지 오래다.

남‧북‧미 정상 합의 모두 무력화

그나마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북한이 모라토리움을 약속하고 지금까지 지켜온 게 성과라면 성과였는데, 이제 그마저 무산 위기인 셈이다. 정부는 그간 수차례 ‘문 정부 들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통해 한반도 긴장이 완화하고 평화가 정착됐다’는 점을 성과로 강조해왔는데, 이런 자평도 이제 설득력을 잃게 됐다.  

문 대통령은 북한의 모라토리움 파기까지 염두에 두고 대응을 논의하라고 지시했지만, 사실 이럴 경우 정부가 취할 마땅한 대응책이 없는 것도 문제다. 미국 주도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를 더욱 강화하는 방안이 사실상 유일한데, 그간 대북 인센티브로 제재 완화를 꾸준히 주장했던 문 정부의 기조와는 맞지 않는다. 북한이 핵실험이나 ICBM 시험발사로 상황을 몰고 간다면, 결국 문 정부의 대북 정책은 ‘자기 부정’으로 끝나게 될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정부가 북한의 모라토리움 파기를 막기 위해 미국 등을 대상으로 더 적극적인 대북 대화 필요성을 설득할 가능성도 있다.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까지 가지 않도록 북한에 대화에 나올 ‘당근’을 제시해야 한다는 논리다. 하지만 이는 ‘나쁜 행동에는 보상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어긋날 뿐 아니라 북한의 안보 위협에 대한 대응 기준을 스스로 낮추는 결과로도 이어질 우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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