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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하늘 노란 밀밭' 우크라 국기가 흔들리면…세계 식량위기

중앙일보

입력

우크라이나의 밀밭. [로이터=연합뉴스]

우크라이나의 밀밭. [로이터=연합뉴스]

“우크라이나 국기의 절반을 차지하는 노란색은 밀을 의미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우려에 밀 선물 상승 #밀가루값 폭등이 기폭제된 ‘아랍의 봄’ 재연될까 #밀 자급률 0.8% ‘세계 최저’ 韓도 예의주시

우크라이나 농업정책 및 식품부 차관(2014~2016)을 지낸 블라디슬라바 투티츠카의 말이다. 그는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소식지와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는 국기조차 농업 국가임을 상기시켜준다”며 이같이 설명했다. 우크라이나 국기는 푸른색과 노란색으로 상하 양분돼 있다. 푸른색은 하늘과 물을, 노란색은 밀을 의미한다.

우크라이나 국기와 닮은 밀밭 풍경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우크라이나 국기와 닮은 밀밭 풍경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흑해의 곡창지대 우크라이나는 세계적인 주요 곡물 수출국이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 탈퇴 후 농업 부문에 꾸준히 투자해왔다. 우크라이나의 흑토 체르노젬(Chernozem)은 밀 재배에 비옥한 토지로 천혜의 환경까지 갖췄다. 90년대 한때 곡물 수확량이 2000만t이었던 우크라이나의 지난해 곡물 수확량은 8400만t에 이른다. 2020년 6500만t에서 29% 늘었다. 로만 레셴코 우크라이나 농업부 장관은 “기록적인 수확”이라고 했다.

우크라이나는 올해 전세계 밀의 12%, 옥수수의 16%를 공급할 것으로 예상된다. 우크라이나의 공급망에 문제가 생기면 세계적인 애그플레이션(Agflation·곡물 가격 상승으로 발생하는 인플레이션)이 심화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실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전운이 고조되면서 국제 밀 선물 가격은 요동치고 있다. 25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국제 밀 거래 벤치마크인 시카고상품거래소의 밀 선물 가격은 이날 3.5% 뛴 부셸당 8.28달러에 거래됐다. 이는 2개월 만의 최고가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이날 프랑스 파리·네덜란드 암스테르담·벨기에 브뤼셀 통합 단일증시 유로넥스트에서 밀 선물 가격은 이틀째 급등했다. 3월물 밀은 t당 291.75 유로까지 올라 지난달 27일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스위스 투자은행 UBS의 전략 담당 도미닉 슈나이더는 로이터에 “최근 몇 달간 흑해 지역에서 지정학적 위험이 높아져 앞으로 밀 가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 인근의 밀밭. [로이터=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 인근의 밀밭. [로이터=연합뉴스]

美 제재에 러시아 밀도 공급 악영향 받을 수도 

특히 우크라이나 밀 생산량의 47%(1200만t)를 담당하는 드네프르 강 동쪽 지역이 요주의 대상이다. 강의 상류는 러시아, 벨라루스에 위치하고 하류는 흑해로 이어진다. 흑해를 통해 전세계에 곡물을 수출하는 우크라이나의 전략적 요충지다. 호주 농업시장분석 회사 메카르도(Mecardo)의 수석 농업 분석가인 아드리안 라다니프스키는 호주 ABC에 “러시아인들이 1200만t 이상의 밀을 수확할 것으로 예상되는 드네프르 강 동쪽 지역에 관심을 가진 게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며 “(러시아) 군이 흑해 항구를 점령할 경우 국제 시장에서 중대한 곡물 공급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했다.

흑해가 불안정해지면 우크라이나 외에도 러시아·카자흐스탄·루마니아 등 주요 곡물 수출국의 공급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들 네 국가 모두 흑해 항구로부터 곡물을 운송하고 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특히 러시아는 세계 최대 밀 수출국이기도 하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전세계 밀 출하량의 3분의 1 가까이 차지한다. 유사시 러시아 본토에는 별 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미국과 유럽의 금융 제재가 러시아의 곡물 수출 흐름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다. 네덜란드 금융회사인 ING는 최근 러시아가 미국의 제재를 받을 경우 전세계 시장에 영향 미칠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놨다. 터키와 이집트는 러시아 밀의 최대 구매자이기도 하다. 아시아타임스도 미국과 유럽이 러시아 기업에 제재를 하면 러시아에서 서아시아로의 식량 공급이 더 제한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앞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해 크림반도를 강제 합병했던 2014년에는 세계 밀 가격이 한 달 만에 75% 급등하는 일도 있었다.

전세계 인플레…‘아랍의 봄’ 가능성도 거론

'아랍의 봄'이 촉발됐던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실업가 고물가 등 경제난에 항의하는 시민들이 2018년 다시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이고 있다. [EPA=연합뉴스]

'아랍의 봄'이 촉발됐던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실업가 고물가 등 경제난에 항의하는 시민들이 2018년 다시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이고 있다. [EPA=연합뉴스]

인플레이션 압력은 벌써부터 커지고 있다. 아시아타임스는 “새로운 (실제) 분쟁이 발생하지 않았음에도 2021년 세계 식량 가격은 1년 전보다 약 30% 상승했다”며 “우크라이나 위기 외에도 에너지 위기, 지역 비료 위기가 추가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재승 고려대 국제대학원 원장은 “가뜩이나 마른 걸레를 쥐어짜듯이, 전세계가 이미 코로나19발(發) 유동성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곡물 등 원자재 가격 인상은 인플레이션 압력을 줄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로이터통신도 코로나19 이후 인플레이션이 전 세계의 주요 관심사인 가운데 흑해 지역의 곡물 흐름에 문제가 생기면 인플레이션의 큰 연료가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밀값 상승은 개발도상국들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 특히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일부 국가들은 우크라이나 밀 의존도가 상당하다. 2020년 레바논에서 소비된 모든 밀의 절반가량이 우크라이나산이었다. 더구나 레바논은 인구의 칼로리 섭취량의 35%가 빵 등 곡물 제품에 의존해, 우크라이나 밀 수입은 ‘식량 안보’와 직결된다. 그 밖에도 밀 소비의 10% 이상을 우크라이나 수입에 의존하는 국가만 14개국이다. 예멘과 리비아는 각각 밀 소비량의 22%와 43%를, 이집트는 총 밀의 14%인 300만t 이상을 우크라이나에서 수입했다. 포린폴리시(FP)와 아시아타임스는 이런 탓에 우크라이나 사태가 악화하면 도미노 현상으로 ‘아랍의 봄’이 재연될 수 있다고도 본다. 2010년 말 튀니지 ‘재스민 혁명’으로 시작된 아랍국 민주화 운동의 기폭제는 밀가루 값 폭등인 것으로 분석된다.

밀 자급률 0.8% 한국도 예의주시

2020년 포스코인터내셔널이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터미널에서 사료용 밀을 선적하고 있다. [포스코인터내셔널]

2020년 포스코인터내셔널이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터미널에서 사료용 밀을 선적하고 있다. [포스코인터내셔널]

밀 자급률이 0.8%로 세계 최저 수준인 한국도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한국의 식용 밀 상당량은 미국, 호주, 캐나다에서 수입하고 있지만, 우크라이나 문제로 수급에 문제가 생기면 국제 밀 가격은 앞으로도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에서 밀을 수입하고 있는 포스코인터내셔널 관계자는 “현재로서는 수입에 차질은 없다”면서도 “최근 공급 업자들이 여러 이유로 수출 물량을 제한하면서 가격이 오르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관세청 수출입통계에 따르면 2020년 한국은 식용밀 250만여t, 사료용밀 약 111만t으로 전체 361만t 가량을 수입했다. 식용밀은 미국(134만여t), 호주(약 97만t), 캐나다(18만여t)에서 수입했다. 사료용밀은 우크라이나(47만여t), 루마니아(23만여t) 등에서 주로 수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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