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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넷플릭스로 윈터링 중입니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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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3호 31면

정여울 작가

정여울 작가

요즘 커플들이 헤어지면 가장 먼저 삭제하는 것이 바로 넷플릭스를 함께 보는 공동프로필이라고 한다. 연인일 땐 요금을 나눠 냈지만, 헤어지면 따로 요금을 내야 하니까. 넷플릭스는 단순한 스트리밍서비스를 넘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관계를 맺어 주는 ‘이야기의 공동체’다. “‘오징어 게임’봤어?” “‘브리저튼’의 흑인여왕 멋지지 않아?” 이렇게 시작되는 젊은이들의 대화에서처럼, 넷플릭스는 소통의 불쏘시개 역할을 한다. 한 달 만원 안팎의 가격으로 24시간 끊김 없이, 광고 없이, 전 세계 영화와 드라마를 볼 수 있는 무제한 스트리밍 서비스(OTT), 넷플릭스는 미디어 환경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영화관에 가지 않고 편안하게 최신영화를 집에서 볼 수도 있고, 중고 DVD로 어렵게 구해 보던 추억의 영화도 언제든 다시 볼 수 있고, 할리우드에 편중된 영화배급의 한계를 넘어 전 세계의 다채로운 컨텐츠를 어디서나 관람하게 됐다. 넷플릭스의 성공으로 인해 ‘TV의 시대’는 좀 더 일찍 저물고, 영화나 드라마를 휴대폰으로 감상하는 사람들이 급증했다. 물론 넷플릭스도 초국적기업으로서 다양한 문제를 지니고 있지만, 넷플릭스로부터 배울 것 또한 여전히 많다.

미디어환경 급변 불러온 OTT
창조적 글쓰기의 위대함 일깨워
전 세계 다양한 콘텐츠 볼 수 있어
팬데믹의 겨울나기에 큰 힘 돼

선데이 칼럼 1/29

선데이 칼럼 1/29

첫째, 넷플릭스는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중한 스토리텔링’의 영향력을 보여 준다. 넷플릭스는 스토리텔링이라는 형태, 즉 뉴스나 빅데이터 같은 차가운 정보가 아닌 ‘인간의 이야기’라는 따스하고도 정감 어린 형태로 인류의 다채로운 욕망을 이해하는 매개체, 세계를 향한 전망대가 돼 주었다.

둘째, 넷플릭스를 통해 우리는 할리우드나 디즈니를 넘어서서 유럽이나 아시아의 풍부한 컨텐츠들을 접할 수 있다. 넷플릭스는 유럽이나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의 다양한 이야기가 평등하게 주목받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백인남성 중심의 주인공이 아닌 다채로운 인종과 강력한 여성캐릭터들, 여성감독과 여성작가의 전성시대가 넷플릭스를 통해 비로소 활짝 열렸다. 전 세계 스트리밍 순위 1위를 석권한 ‘오징어게임’이 넷플릭스에서 배급되지 않았더라면 이 같은 성공을 거두기 어려웠을 것이다. 전 세계의 창작자들이 할리우드와 나란히 경쟁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은 것이다.

셋째, 넷플렉스는 우리에게 ‘창조적인 글쓰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준다. 3년째 지속되는 팬데믹 속에서도 가장 타격을 덜 입은 분야가 바로 스토리텔링 분야였다. 힘든 상황일수록 인간은 더욱 흥미로운 이야기, 더 감동적인 이야기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 넷플릭스에서 오랫동안 사랑받는 컨텐츠들은 대부분 소설 원작이 있다. ‘문학은 이제 끝났다’고 호언장담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넷플릭스, 왓챠, 디즈니플러스, 애플tv 등 수많은 스트리밍서비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여전히 문학이 스토리텔링의 중심에 서 있으며, 인류가 살아 있는 한 문학의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은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며칠 전 『인생의 겨울을 지날 때』라는 아름다운 에세이를 읽다가 ‘윈터링(wintering)’이라는 단어를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다. 윈터링은 겨울나기, 월동, 나아가 추운 계절을 살아 내는 모든 과정이다. 윈터링은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느낌, 문밖으로 밀려난 느낌, 아웃사이더가 된 느낌을 견뎌 내는 인생의 휴한기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는 넷플릭스를 비롯한 수많은 ‘이야기의 공동체’를 통해 팬데믹이라는 ‘인류의 윈터링’을 견뎌 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넷플릭스는 팬데믹의 기나긴 터널을 지나고 있는 인류에게 집안에서도 세계의 다채로움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물론 넷플릭스에 지나치게 중독되면 소파에 달라붙어 바깥활동을 멀리하는 ‘카우치 포테이토(couch potato)’가 될 위험이 있지만.

최근 넷플릭스에서 나를 사로잡는 테마는 ‘리줌(resume)’, 즉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대도시를 벗어나 시골이나 고향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득한 향수를 자극한다. ‘체서피크 쇼어’ ‘버진 리버’ ‘스위트 매그놀리아’등의 주인공들은 노년기에 은퇴하는 것이 아니라 한창때에 낙향한다. 무한경쟁과 교통지옥, 대기오염이 없는 곳. 스타벅스와 맥도널드도 없지만, 이웃의 아픔에 대한 진심 어린 공감과 광활한 대자연의 아름다움이 있는 곳. 그곳에서 사람들은 외상후스트레스장애와 우울증, 끊임없이 생산성을 갈망하는 도시인의 삶으로부터 벗어난다. ‘버진리버’의 멜처럼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죽고 남편이 교통사고로 사망해도, 그럼에도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용기를 주는 사랑이야기는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인류의 스토리텔링이다. 꿈과 희망이 다 무너져 버린 곳에서도 인간은 다시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 넷플릭스가 가장 잘한 것은 수많은 창작자에게 새로 시작할 기회를 주었다는 점이다.

고통을 숨기지 않고 구원을 요청하고, 스스로 자신을 치유하려는 모든 몸짓은 결국 도움이 된다. 나는 넷플릭스를 통해 내 나름의 윈터링을 하고 있다. 우리는 넷플릭스를 통해 인류의 겨울에 대처하는 기술, 슬픔에 대처하는 기술, 다시 희망을 잃지 않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기술을 배운다. 삶이 다 무너진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오히려 가장 소중한 것들은 이토록 눈부신 모습으로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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