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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대 曰] 틱낫한 스님이 남긴 것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73호 30면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

가령 한 의사가 당신에게 3개월밖에 살 수 없다는 말을 했다고 치자. 당신은 남은 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운명을 한탄하고 시간을 낭비하며 고통과 절망에 몸을 맡길까? 아니면 그 3개월의 매 순간을 깊이 있게 살아갈 결심을 할까?

세계적 명상 지도자 틱낫한 스님이 했던 죽음에 관한 법문의 일부다. 실제 ‘3개월 시한’ 선고를 받은 한 젊은이가 그를 찾아와 털어놓은 고민이라고 한다. 스님의 대답은 매 순간을 깊이 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살면 3개월도 짧지 않은 시간이라는 말을 덧붙였다고 하는데, 깊이 있게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삶이란 탄생과 죽음의 연속적 공동 작업
좋음-나쁨 이분법 경계 … 깊이 있게 살라

지난 22일 입적한 틱낫한 스님을 향한 추모의 물결이 곳곳에서 잔잔하게 이어지고 있다. 언뜻 평범해 보이는 그의 법문에 영향을 받은 이가 적지 않은 듯하다. 이 시점에 그가 남긴 ‘죽음 명상’을 되새겨보는 것도 의미가 있어 보인다. 누구도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지 않은가. 우리 모두 언젠가 죽지만, 그 언젠가가 언제인지를 모를 뿐이다. 3개월보다는 길다고 해도 ‘시한부 인생’이긴 마찬가지다.

프랑스 남부 보르도 지방에 그가 세운 수행 공동체 ‘플럼 빌리지’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다. 20년 전의 일이지만, 그의 법문을 듣고 그가 이끈 ‘걷기 명상’에 참가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호흡을 조절하며 조용히 걷다가 ‘멈춤’ 신호와 함께 동작을 그쳤다. 걷기와 멈춤을 반복해 나가는 명상은 우리 삶의 과정을 연상케 한다. 멈춤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 세상의 문제는 대개 멈출 줄 모르는 데서 생기는 것 같다.

틱낫한은 죽음을 삶과 별개로 여기지 않았다. 태어나고 살아가는 것만큼 죽음을 중요하게 여겼다. 삶과 죽음은 서로 맞물려 있어 아주 친한 친구 같다고 했다. “우리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날은 우리가 다른 모양들로 이어지는 날”이라고 했던 그의 법문이 새삼 다시 떠오른다. 태어남과 죽음의 ‘공동 작업(collaboration)’이 있기에 삶이 가능하다고도 했다. 죽음과 태어남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매 순간 우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일생과 베트남 전쟁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젊은 시절부터 겪은 전쟁의 참혹함이 그의 명상에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승려의 신분으로 전쟁에 반대하며 평화 운동을 펼쳤다. 전쟁의 상처로 고통받는 이들을 치유하는 일을 했고, ‘보트 피플’로 불리는 베트남 난민을 구제하는 일에 나서기도 했다. 상처받은 이들은 베트남의 남쪽, 북쪽에 다 존재했다. 한쪽 편을 들어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양쪽으로부터 배척당했다. 망명자로 40여 년을 떠돌다 2004년에야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는 이런 법문도 남겼다. “쓰레기 속에서 나는 장미를 봅니다. 장미 속에서 나는 쓰레기를 봅니다. 모든 것은 몸을 바꾸며 존재합니다. 영원한 것마저 영원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물을 둘로 나누어 하나는 좋고 하나는 나쁘다고 보는 선입견을 그는 경계한다. 이를 위해 그가 중시하는 수행이 ‘마음챙김(Mindfulness)’이다. 그는 영성의 시인이었다.

그는 떠났어도 그의 가르침은 계속 울려 퍼질 것 같다. 그가 심어 놓은 마음챙김의 씨앗이 곳곳에서 자라나고 있다. 2014년 뇌출혈로 거동이 불편해진 이후 그의 제자들이 ‘플럼 빌리지 법사단’이란 이름으로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2019년 그 법사단이 한국 김천의 직지사에 와서 명상 수행을 이끌었다. 이때 참여한 느낌으로 볼 때, 보르도 플럼빌리지의 수행을 옮겨놓은 듯했다. 죽음이 끝이 아님은 이렇게도 입증이 되는 듯하다. 당시 법사단을 직지사로 초청했던 한국의 마가 스님이 서대문구 현성정사에 분향소를 마련했다고 하여 스님을 기억하며 향을 피워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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