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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풍운아’는 혁명의 혼란을 경멸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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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3호 20면

나폴레옹 세계사

나폴레옹 세계사

나폴레옹 세계사
알렉산더 마카베리즈 지음
최파일 옮김
책과함께

보나파르트 나폴레옹(1769~1821)은 흔히 ‘정복’과 동의어로 통해왔다. 혁신적인 작전으로 연전연승을 거두면서 적들에겐 그야말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옛소련에서 1991년 독립한 조지아 출신으로 미국 루이지애나 주립대 역사 교수인 지은이는 이런 나폴레옹을 프랑스의 영웅을 넘어 현대 세계의 원형을 설계한 건축가로 평가한다. 영향력이 프랑스나 유럽에 머물지 않고 전 지구적으로 확산했다는 설명이다. 우선, 나폴레옹 전쟁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 확장 경쟁 속에 아메리카·아프리카·인도·중동·인도네시아·필리핀으로 확대됐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혁명 정신과 합리주의·계몽주의가 세계 곳곳에 전파돼 변혁 운동의 동력을 제공하면서 오늘날 글로벌 스탠더드 사상으로 자리 잡는 데 이바지했다는 지적이다.

지은이는 나폴레옹을 이해하려면 그가 프랑스 대혁명 시대 기회를 잡은 ‘혁명의 풍운아’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혁명세력이 1793년 국왕 루이 16세를 처형하자 영국 등 유럽 군주국들이 대프랑스 동맹을 구성하면서 혁명전쟁이 터졌다.

1808년 나폴레옹이 마드리드의 항복을 수락하는 모습. 앙투안-장 그로의 회화에 바탕해 제작한 19세기 석판화다. [사진 책과함께]

1808년 나폴레옹이 마드리드의 항복을 수락하는 모습. 앙투안-장 그로의 회화에 바탕해 제작한 19세기 석판화다. [사진 책과함께]

절체절명의 프랑스에 나타난 구세주가 젊은 포병장교 나폴레옹이었다. 1793년 남부 툴롱 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인상적인 전공을 세웠다. 항구가 보이는 고지대로 야포를 옮긴 뒤 48시간에 걸친 집중 포격으로 영국군과 스페인군을 제압했다. 그전까지 보병의 보조 역할을 하던 포병을 전투의 중심에 올려놓은 혁신이 주효했다.

나폴레옹의 힘은 대포에서 나왔다. 1794년 반혁명 왕당파가 무장봉기하자 대포로 군중에 산탄을 쏘아 진압했다. 이를 계기로 당시 총재 정부의 신임을 얻어 수도 파리의 정보와 치안 책임자가 됐다. 이탈리아 제노바가 1768년 프랑스에 팔아넘긴 지중해 코르시카 섬에서 나고 자란 소수민족 출신이 파리의 중앙 정계에 우뚝 섰다.

1796년 이탈리아로 원정해 오스트리아군을 물리치고 수도 빈까지 점령했다. 프랑스는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위력을 떨치기 시작했다. 1798년엔 이집트 원정을 떠나 패권을 다투던 영국을 견제했다. 혁명전쟁이 본격적으로 유럽 밖으로 확산한 원정이자, 180명의 학자를 원정에 대동해 문화·학술 국가 프랑스의 바탕을 닦은 사건이다.

1799년 파리로 돌아온 나폴레옹은 브뤼메르 쿠데타로 권력을 낚아챘다. 새 헌법을 만들어 10년 임기의 제1통령에 올랐다. 1800년에는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마렝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물리쳤다.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는 말을 남긴 뒤 말을 타고 알프스를 넘는 초상화는 그의 위엄을 상징한다.

이 승리로 오스트리아가 제2차 대프랑스 동맹에서 이탈해 영국만 남았다. 영국도 결국 1802년 프랑스와 아미앵 평화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이는 1년만 유지되고 휴짓조각이 됐다. 왜 그랬을까. 지은이는 개인의 호전성보다 영국의 경제적 팽창이라는 상황에 주목했다. 1750~1800년 유럽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영국은 8.2%에서 15.3%로 성장했지만, 프랑스는 17.2%에서 14.9%로 축소됐다. 무역 국가인 영국은 프랑스와 비교해 무역량은 세 배, 상선과 종사자 규모는 두 배가 됐다. 이러한 경제 역전 상황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유럽은 물론 글로벌 패권과 식민지, 무역 등 이익을 놓고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는 게 지은이의 분석이다.

프랑스를 위대한 나라로 만들면서 개인적 인기가 높아지자 혁명의 풍운아는 1804년 파리 노르트담 대성당에서 스스로 황제가 됐다. 애초 혁명 전파를 막기 위해 유럽 군주국이 결성했던 대프랑스 동맹은 이제 나폴레옹의 팽창에 맞서 세력균형을 추구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대프랑스 동맹은 나폴레옹이 몰락한 1815년까지 일곱 차례나 결성됐다. 이렇게 19세기 초는 전쟁의 시대로 흘러갔다.

특히 영국은 대혁명부터 나폴레옹 시대까지 20년간 필사적으로 프랑스에 대항했다. 군사비 부담으로 1792~1814년 국가부채가 세 배로 늘었을 정도다. 나폴레옹과의 전쟁터인 트라팔가르나 워털루가 런던의 광장과 역 이름으로 쓰이는 이유다.

독특한 것은 나폴레옹이 혁명을 먹고 자란 영웅이지만, 그 자신은 혁명에 따른 혼란과 혼동, 급진적인 변화, 특히 주력인 군중을 경멸했다는 사실이다. 지은이는 나폴레옹이 혁명보다 관용과 법 앞의 평등, 합리주의, 그리고 질서와 권위를 선호했다고 강조한다. 계몽주의의 자식이라는 이야기다.

나폴레옹은 강한 프랑스를 지향했으며, 민주공화정이나 주권을 인민 의지에 넘긴다는 이상론과는 거리를 뒀다. ‘나폴레옹 법전’ 편찬은 법치와 합리주의 의지의 구현을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군인 나폴레옹과 황제 나폴레옹의 차이다. 난세 영웅의 다양한 면모와 국제관계를 바탕으로 나폴레옹 전쟁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1440쪽. 원제 『The Napoleonic W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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