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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럭 호철’서 ‘할아버지’로, 팀 바꾸려고 나 먼저 변했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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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3호 24면

[스포츠 오디세이] 여자배구 IBK기업은행 김호철 감독 

IBK 체육관에서 환하게 웃으며 촬영에 응한 김호철 감독. 정준희 기자

IBK 체육관에서 환하게 웃으며 촬영에 응한 김호철 감독. 정준희 기자

‘버럭 호철’이 변했다. 목에 핏대를 세우고 도끼눈을 뜬 채 선수들을 몰아붙이던 독종 승부사가 이제는 실수해도 웃어주고, 멋진 플레이가 나오면 펄쩍펄쩍 뛰며 좋아하는 ‘할아버지’가 됐다. 여자배구 IBK기업은행 김호철(67) 감독 얘기다.

이탈리아에서 가족과 함께 연말을 보내던 김 감독은 IBK기업은행의 러브콜을 받았다. 김사니 코치와 주전 세터 조송화의 팀 무단이탈 및 ‘감독 교체 쿠데타’로 인해 만신창이가 된 IBK는 강한 카리스마를 지닌 김 감독이 팀을 쇄신해 주기를 원했다.

‘컴퓨터 세터’라는 별명답게 최고의 선수와 지도자로 커리어를 쌓은 김 감독이었지만 여자 팀은 처음이었다. 부임 후 6연패에 빠졌다가 지난 1월 15일 흥국생명을 꺾고 첫 승을 올린 김 감독은 이후 1승1패를 거두며 팀을 안정시켜 나가고 있다. 프로배구 V리그 4라운드를 마치고 5라운드를 준비 중인 김 감독을 경기도 기흥에 있는 IBK기업은행 연수원에서 만났다.

가끔 ‘버럭’ 하지만 마스크 덕에 넘어가

지난해 12월 23일 경기도 화성에서 열린 프로배구 V리그 IBK기업은행과 도로공사의 경기에서 산타 모자를 쓴 김호철 감독이 김수지 선수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뉴스1]

지난해 12월 23일 경기도 화성에서 열린 프로배구 V리그 IBK기업은행과 도로공사의 경기에서 산타 모자를 쓴 김호철 감독이 김수지 선수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뉴스1]

팀에 처음 와 보니 어떻던가요.
“선수들이 그 일로 인해 많이 힘들어하고 있고, 구단과 팬들도 상처를 많이 받았더라고요. 언론에 노출 안 되게 선수들을 만나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했죠.  지나간 얘기는 하나도 안 했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만 갖고 생각을 나눴습니다.”
선수들한테 공통적으로 한 얘기는?
“‘열정을 다해 현실을 이겨내야 한다. 지나간 일은 한 마디도 묻지도 않고 궁금해 하지도 않겠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전부 삭제를 해라’고 했죠. 선수들이 처음에는 긴가민가하더니 한 달이 지나도 그 얘기를 전혀 안 하니까 조금씩 마음을 열더라고요.”
훈련은 어디에 중점을 뒀나요.
“4라운드까지는 팀 재정비 기간으로 잡았습니다. 체육관에 나오면 ‘오늘 재밌게 할 수 있겠다’ 싶도록 연습 프로그램을 만들었죠. 선수들에게 ‘5,6라운드는 너희들 점검을 하겠다. 내년 시즌을 준비해야 하니까’라고 일러줬습니다. 5라운드부터는 조금 더 나은 모습으로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선수들이 ‘김호철’이 누군지 알고 있었을 텐데요.
“처음엔 많이 긴장한 것 같더라고요. 선수들에게 ‘내가 변해야 너희들도 변할 것 같다. ‘버럭 호철’도 변할 테니까 너희들도 같이 변해라’고 했습니다. 가끔 가다 버럭버럭이 나오지만 마스크 덕분에 혜택을 보고 있어요. 하하.”
작전이나 전술의 변화는?
“벌써 뭘 바꾼다는 건 성급한 것 같고, 개개인의 능력을 향상시키고 장점을 모으는 훈련을 하고 있죠. 김희진은 원래 대표팀에서 라이트인데 팀에 오면 라이트에 용병이 좋으니까 레프트나 센터로 뛰었어요. 희진이의 잠재력을 살리려면 라이트로 계속 가고, 수비가 되는 용병을 레프트로 보내는 게 맞다고 봅니다.”
김호철 감독이 김하경 세터에게 작전 지시를 하고 있다. [뉴스1]

김호철 감독이 김하경 세터에게 작전 지시를 하고 있다. [뉴스1]

김 감독은 ‘지도자는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그는 “제가 먼저 체육관 올라가서 기다리고, 충분히 대화하고, ‘오늘은 이런 거 할 거다’ 공고해서 이해시킵니다. ‘나는 기본만 줄 테니 응용은 너희들이 해라’고 강조하죠” 라고 말했다.

세터 김하경 선수가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하셨는데요.
“그건 위로의 말이라 생각하고, 당연히 해야 하죠. 팀의 가장 중요한 선수고, 가장 힘든 일을 해 줘야 하는 포지션인데 스스로 극복하지 못하면 세터로서 자질이 모자라는 겁니다. 그걸 이겨내지 못하면 세터로서는 포기하는 게 낫습니다. 너무 가혹한 말 같지만….”
김하경 선수의 장단점은?
“장점은 성실하다는 겁니다. 하나를 가르쳐 주면 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움직이는 발의 모양, 손 모양, 토스의 타임, 운영하는 기술 등 단계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금은 3분의 2까지는 온 것 같네요. 하경이의단점은 해 보다가 안 되면 금방 실망하고 포기하는 경향이 있다는 겁니다. 주전으로서 계속 안 뛰어봤기 때문에 나오는 거라서 점점 좋아질 겁니다.”
아이돌급 외모로 주목받는 세터 이진 선수는 어떤가요.
“진이는 스타성이 있고, 움직임과 테크닉이 좋아서 잘 가르치면 크게 발전할 선수입니다. 문제는 아직 어려서인지 집중력이 너무 떨어진다는 겁니다. 연습은 힘들게 하는데 경기는 많이 못 나가니 아쉽겠지만 앞을 내다보고 열심히 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세터 김하경 성실, 이진은 테크닉 장점

손녀뻘 선수들과 소통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저는 마음을 줄 수 있는데 선수들의 마음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저들 속에 들어가야 대화가 된다는 결론을 내렸죠. 내가 먼저 다가가려고 농담도 하고, 연습 때 잘하면 팔짝팔짝 뛰기도 했죠. 처음에는 ‘좀 위선적이지 않나’라며 밀어내는 반응이 있었는데 지금은 ‘저희 할머니보다 나이가 많아요’ 라면서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선수들도 있어요.”

조금은 불편한 질문을 할 때가 됐다. 이번 IBK 사태가 코치와 일부 베테랑 선수가 작당해서 감독을 몰아낸 것 아니냐는 의혹에 대해서다. 이에 대해 김 감독은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났습니다”라며 “여자 프로팀에서 감독의 중요성을 잊고 있는 것 같아요. 선수만 잘 관리하면 된다 하는데, 그 선수 관리하고 가르치는 사람은 감독입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선수도 지도자도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야죠”라고 말했다.

남자배구의 들러리였던 여자배구가 국내 최고 인기 스포츠가 됐는데요.
“여자배구는 그만한 대우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김연경이라는 세계적인 선수가 나왔고, 위상도 높아지고, 개개인 능력도 좋아져 많은 팬들을 얻었죠. 지금은 호황이지만 한번 뒤돌아서서 생각해봐야 할 때입니다. 여고 배구팀이 열 몇 개밖에 없는데, 프로 구단들이 초등학교부터 시작해 저변확대에 신경을 더 써야 합니다.”
중앙UCN 유튜브 채널

중앙UCN 유튜브 채널

김 감독이 팬들에게 인사를 했다. “IBK기업은행이라는 명문구단을 자랑스럽게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우승도 좋지만 팬들이 ‘아하, 우리가 좋아하던 배구가 다시 왔구나’ 하는 느낌을 만들어 주는 게 제 역할입니다. 조금만 참고 기다려 주시고 응원해 주세요.”

“발에 못질?” … 작전타임도 재밌는 ‘김호철표 배구’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대표팀에서 뛸 당시의 김호철 세터(가운데). [중앙포토]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대표팀에서 뛸 당시의 김호철 세터(가운데). [중앙포토]

“너네 감독은 뒤로 물러서는 거 싫어해. 사움닭(싸움닭)이야.”

“발에 못질해 놨냐? 점심 때 뭐 잘못 먹었어?”

IBK기업은행 경기는 게임보다 작전타임이 더 재미있다는 말이 나온다. 김호철 감독의 원초적인 표정과 멘트, 선수들의 각양각색 반응이 어우러지는 ‘개그 쇼’다.

김 감독이 부임 후 첫 승을 거둔 흥국생명전에서도 ‘작탐(작전타임) 개그’는 이어졌다.

2-2로 맞선 5세트, 승리까지 1점을 남긴 14-11에서 김 감독은 세터 김하경에게 “(수지) 언니한테 하나 빼 주면 누가 잡아먹어? 이 색기야”라며 김수지에게 토스할 것을 지시한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는 김수지에게 김 감독은 “웃지 말고 결정을 내 줘야 한다니까”라고 채근한다.

김 감독은 “옛날에는 작전타임에 화를 내면서 얘기했던 게 기억나고, 그때 왜 그렇게 화를 냈을까 싶어요”라고 회고한 뒤 “내가 경상도 톤이라 선수들이 잘 못 알아듣는 게 많아서 듣기 쉽게 하려고 합니다. 사실은 연습하면서 다 얘기했던 부분인데, 갑자기 상황이 바뀌면 그 부분을 빨리 캐치해서 전달하려다 보니 엉뚱한 말도 나오고, 선수들 긴장을 풀어주려고 농담과 비유를 섞기도 하죠”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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