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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비가 와요! 시시하고 사소한 일상 용어의 소중함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박혜은의 님과 남(109)

지인들과 한 달에 한 번 작은 독서모임을 하고 있는데 연초 시집 한 권을 읽고 나눴습니다. 김남조의 편지나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처럼 익숙했던 시들을 다시 읽으며, 이미 알고 있었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조금씩 변해 온 내가 느끼는 감동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죠. 제목만 알고 있었던 유명한 시들을 새롭게 읽기도 하고, 발표된 지 이미 오래된 시들이지만 내게는 처음인 시들을 읽으며 오랜만에 시의 매력에 빠졌습니다.

함께 밥 먹는 것이 참 중요하다. 밥을 먹으며 얼굴을 마주보는 행위는 서로의 존재를 확인해주고, 출근길에 건네는 ‘잘 다녀와’는 상대를 응원하는 목소리가 된다. [사진 pixnio]

함께 밥 먹는 것이 참 중요하다. 밥을 먹으며 얼굴을 마주보는 행위는 서로의 존재를 확인해주고, 출근길에 건네는 ‘잘 다녀와’는 상대를 응원하는 목소리가 된다. [사진 pixnio]

그 가운데 부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신달자 시인의 시 한 편을 만났습니다.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는 그녀의 에세이에 담긴 시라고 합니다.

여보! 비가 와요

아침에 창을 열였다
여보! 비가 와요
무심히 빗줄기를 보며 던지던
가벼운 말들이 그립다
오늘은 하늘이 너무 고와요
혼잣말 같은 혼잣말이 아닌
그저 그렇고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소한 일상용어들을 안아 볼을 대고 싶다

너무 거칠었던 격분
너무 뜨거웠던 적의
우리들 가슴을 누르던 바위 같은
무겁고 치열한 싸움은
녹아 사라지고
가슴을 울렁거리며
입이 근질근질 하고 싶은 말은
작고 하찮은
날씨 이야기 식탁 위의 이야기
국이 싱거워요?
밥 더 줘요?
뭐 그런 이야기
발끝에서 타고 올라와
가슴안에서 쾅 하고 울려오는
삶 속의 돌다리 같은 소중한 말
안고 비비고 입술대고 싶은
시시하고 말도 아닌 그 말들에게
나보다 먼저 아침밥 한 숟가락 떠먹이고 싶다

결혼 9년 만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남편을 24년간 수발하고, 쓰러진 시어머니는 9년을 병상에 계시다 돌아가셨습니다. 남편도 결국 시인을 떠나고 시인은 유방암 판정을 받았죠. 한순간도 쉽지 않았을 그녀의 인생 안에서 쓰였을 시는, ‘여보! 비가 와요’라는 상쾌한 느낌의 시 제목과는 다르게 한 줄도 가볍게 읽히지 않습니다.

한편 시인의 삶을 떠나서 시를 접하는 독자의 입장에서도 부부가 함께하는 삶에 다가오는 여러 문장이 있습니다.

사랑으로 시작한 많은 부부가 어느 순간에는 겼었을 격분과 적의, 무겁고 치열한 싸움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치열한 순간을 지나 어느 순간 다가오는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소한 일상용어들, 가볍지만 절대 가볍지 않은 말들의 소중함을 생각해 봅니다. ‘혼잣말 같은 혼잣말이 아닌’이란 표현에선 살포시 공감의 웃음도 납니다.

시인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식사에 관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함께 밥 먹는 것이 중요합니다. 밥을 먹으며 얼굴을 대하는 행위는 ‘네 곁에 내가 있어’라고 묵언 중에 말하며 응원해주는 것이죠. 아침 출근길에 던지는 ‘잘 다녀와’라는 말을 들을 때 ‘아, 내옆에는 나를 응원하는 목소리가 있어’라고 느낄 수 있죠”

격분과 적의, 무겁고 치열한 싸움들로 지치는 순간들도 분명 존재합니다. 하지만 올해는 사소한 일상용어들의 소중함을, 혼잣말 같은 혼잣말이 아닌 상대의 말에 조금 더 귀 기울 수 있기를 연초에 만난 시 한 편을 통해 한 번 더 다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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