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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재명공자·윤석열의 동상이몽 "천하 삼분지계(三分之計)로 내가 이긴다" [이정재의 대권무림 2부⑩]

중앙일보

입력

이정재의 정치풍자 무협판타지 대권무림

〈2부 제10화〉원후취월(猿猴取月) 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는 자 누구인가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철수의사(義士) 안철수는 '피식' 웃었다.
 딸 아이가 부르던 동요 한 소절이 떠올랐다.
 그래, 내가 나와야지. 내가 나와야 좋은 거지. 남들만 나오는 TV가 무슨 재미인가.
 혹여 반푼 재명공자와 나찰수 윤석열만의 TV논무(論武)가 이뤄졌으면 어쩔뻔했나.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꼼짝없이 '양호지쟁(兩虎之爭)'이란 세뇌술(프레임)에 갇혔을 것이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정족지세(鼎足之勢), 세 솥발이 서로 팽팽히 맞서는 형세.
 세 솥 발을 발판으로 중원을 노려야 한다. 이름하여 제갈량의 천하 삼분지계.
 그러려면 꼭 필요한 게 TV 논검(論劍)비무다.

哲秀當日嘆孤窮 철수는 그때 외롭고 궁핍해 탄식했는데
何幸判官有電視 판관이 TV토론을 잡아주니 얼마나 다행인가

欲識他日分鼎策 훗날 천하가 셋으로 나뉠 방법 알고 싶었던바,

都人笑指畵面中 모든 이들이 웃으며 TV화면을 가리키더라

 TV 논검비무는 마지막 남은 승부처다.
 실제 칼은 안 들었지만, 칼보다 날카로운 혀를 상대해야 한다.
 잘해서 내 세력을 불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적을 낭떠러지에 밀어 넣을 수는 있다.
 물론 다 뜻대로 되는 건 아니다.
 반대로 내가 당할 수도 있다.

 아픈 기억도 있다.
 지난 19대 지존 비무 TV논검 비무는 내겐 악몽이었다.
 다 잡은 싸움을 TV논무로 졌다.
 민주련의 세뇌술에 쉽게 넘어간 내 잘못이었다.
 18대 지존 비무 땐 또 어땠나.
 통진방주 정희가 그네공주를 공개 저격했다.
 그는 "나는 당신을 쓰러뜨리려고 지존비무에 출전했다"며
 TV논무 내내 그네공주에게만 공격을 퍼부었다.
 그네공주를 쩔쩔매게 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아뿔싸 되레 강호의 민심이 역류했다.
 동정표가 몰리면서 그네공주의 세력이 더 커졌다.

 내겐 충분한 실전 경험이 있다.
 이번 TV논검에선 결코 지난번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리라.
 승산은 내게 있다. 강호 민심은 두 갈래다.
 '나찰수는 무조건 싫다'와 '재명공자는 죽어도 싫다'.
 이런 백성들의 마음을 다독거려 줄 이, 나 말고 누가 있으랴.
 게다가 저들의 무공과 초식을 보라.
 하나같이 판박이. 퍼주기 아니면 베끼기다.
 이런 독창성 없는 무공으로 어찌 강호의 새 미래를 열어갈 수 있겠나.
 과학 무림지존, 이게 나의 비전이요 대한 무림의 미래다.
 나의 비무는 운명이다. 대한무림의 미래를 열라는 준엄한 명령이다.
 철수의사에겐 그 준엄한 명령이 뚜렷이 들리는 듯했다.

'철수여, 우리들은 미래를 보는 눈빛으로 당신을 본다. 그것은 기대와 갈앙(渴仰), 그리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애증으로 가득 차 있다.'

 # 모든 전투에서 이기는 전쟁은 없다 

무림신사 정성호가 굳이 요청해 시작한 바둑 한 판.
바둑판엔 5곳에서 어지러이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재명공자는 어느 한 곳 물러나는 법이 없었다.
강수, 또 강수.

"주군, 모든 전투에 이겨야만 전쟁에서 이기는 게 아니오."

무림신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주군의 장점이자 강점이 바로 토론 비무를 너무 잘한다는 것이요.
그러니 하나도 지지 않으려 하오. 어떤 주제든 다 이기려고 한다는 말씀이오.
주군은 반상의 모든 싸움에서 이기고 승부도 이기고 싶어하오.
하지만 그건 너무 위험하오.
반상의 전투란 본래 내가 강한 곳이 반이면, 적이 강한 곳도 반.
다 이기려다간 필시 화를 부르게 마련이오.
적이 강한 곳은 피하고
내가 강한 곳에서 싸워야 하오.
모든 전투에서 이겨도 전쟁에선 질 수 있소. 지금의 이 바둑처럼."

그랬다. 재명공자는 5곳의 싸움에서 모두 이겼지만, 결과는 정성호의 반집 승이었다.

"차라리 심술(心術)도사 홍준표에게 배우시오.
모르는 척, 물러서고 져주시오.
웃고 칭찬하고 넘겨주시오.
재명스러움 대신 무림지존 다움을 보여주시오.
남은 기회는 하나.
TV논검비무 뿐이요.
다 이기려면 필히 질 것이요,
물러설 줄 알면 비로소 승리의 길이 열리리다.
내 이런 이치를 말하고자
굳이 주군께 바둑 한판을 청했소이다."

"명심, 또 명심하리다."

재명공자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무림신사 정성호의 말이 아니라도 잘 안다.
3할 5푼에 갇힌 내 세력은 준동의 기색이 전혀 없다.
이대로는 안 된다.

더 끌려가면 무조건 패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나.

자신 있었다. 무조건 이기는 싸움이었다.
청와궐과 감찰, 포졸과 거대 여권무림까지 다 내 것이다.
이 압도적 화력으로 못 해낼 게 뭐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나로 말하면 만사무불통지(萬事無不通知), 천하에 모르는 것이 없다.
십팔반 무예를 모두 익혔다.
다만 내가 놓친 것은 하나 있다. 인성(人性)
그러나 도대체 그게 뭐냔 말이다.
무림의 철칙은 강자존(强者存), 강한 것이 살아남는 법 아니던가.
가족과 인성쯤이야 강해지기 위해 얼마든지 희생이 가능한 것 아니었더냐.
그런데 이게 뭔가.
그 잘 듣던 암수와 암계가 무용지물이 됐다.
옥수날심 김건희를 때리면 혜경궁김씨가 소환되고
고발사주엔 대장동이 거울에 비친다.
녹취록을 틀면 형수 욕설 소리가 더 커진다.
이래서야 백약이 무효다.

그렇다고 절망은 이르다.
우리 백성들은 쉽게 잊고 용서한다.
한 달여 뒤, 비무 당일에는 모두 잊을 것이다.
호남과 열성 지지 백성이 뭉칠 것이다.

반전의 시작은 TV논검비무부터다.
내 세력을 키울 수는 없지만
나찰수 윤석열을 나락으로 떨굴 수는 있다.

아직 비장의 절초가 두 개 남아 있다.
하나는 철수의사 안철수와의 협력이다.
민주련주 송영길은 자신의 임무를 다해낼 것이다.
내가 이겨야만 그의 차차기 지존좌도 든든해질 것이므로.
안철수의 세력은 내 쪽으로 합해져야 더 큰 힘을 낼 수 있다.
나와 합하면 그의 세력 중 8할이 내게 올 것이다.
그러나 나찰수는 안철수의 세력 중 절반도 얻지 못할 것이다.
안철수는 "재인군을 같이 치자면 좋다"며 비아냥댔지만,
그것도 좋다. 왜 안 되겠나.
이길 수만 있다면, 철수의사의 무슨 조건이든 들어줄 수 있다.
연합무림, 공동통치인들 약속 못 하랴.
내가 지존좌를 쥔 후에 "진짜인 줄 알더라"며 뒤집으면 그만이다.

안철수와의 합일은 그것이 성사되든 안 되든, 내게는 이득이다.
적어도 나찰수와 안철수의 합일을 막아줄 테니.

그런데 TV논검비무도 안철수의 정족지세도 안 통하면, 그땐?
결국 마지막 절초, 내각무림과 임기단축공을 꺼내 들 수밖에 없나.
그래, 뭐든 못하랴. 이길 수만 있다면. 어차피 무림은 강자존.
끓는 물 속의 개구리처럼
무기력하게 죽어갈 수는 없다.

# 끊어야 할 때 끊지 못하면 되레 당한다

"하나. 범인 취조하듯 하면 안 됩니다.
 재명공자는 여권 무림의 지존후보. 격에 맞는 대접을 해줘야 하오.
 재명공자를 공격하는 것은 오로지 백성의 알 권리를 위해서라고 믿게 해야 하오.
둘. 모르는 걸 안다고 하는 순간 바보가 되는 것, 모르면 모른다고 하시오.
 심술도사 홍준표에게 배우시오. 모르면 모른다고 하고, 유머를 잊지 말아야 하오.
셋, 일신우일신을 명심하시오.
 두 달 전 경선 때보다 나아졌다. 환골탈태했다. 열심히 공부했다.
 이젠 웬만한 초식은 다 구사할 수 있게 됐다.
 이렇게 백성들이 믿게 하시오.
 비결은 하나, "학습속도가 빠르다"는 말을 되뇌는 것이오."

 백발자 한길공의 열변에 나찰수 윤석열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난 국힘방 경선 비무는 손발을 묶고 싸웠습니다.
같은 편을 반신불수 만들 수는 없잖습니까.
제 성명절기 나찰수는 아예 접어두고 수비초식만 잔뜩 펼쳤지요.
이번엔 다를 겁니다.
이번에야말로 누구 하나 죽어도 상관없는 진검 승부.
재명공자에게 아예 회복 불능의 상처를 입힐 것입니다. "

한길공이 흐뭇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논검비무는 기세, 기세에 눌리면 심마(心魔)가 찾아오지요.
심마에 빠지면 자신감을 잃고 어떤 무공도, 어떤 초식도 휘두를 수 없게 됩니다.
재명공자를 심마에 빠뜨릴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지요."

"철수의사 안철수는 어찌 상대해야 좋을까요.
이참에 기를 꺾어 감히 정족지세는 꿈도 꾸지 못하게 해야겠지요?"

한길공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허허실실이라, 있는 듯 없는 듯하시오.
반푼 재명공자와 그의 측근들은 정족지세가 필승이라며 좋아하지만, 천만의 말씀.
철수의사가 버텨주는 게 오히려 귀공에게 유리합니다.

재야무림의 반문(反文) 세력은 위기의식을 느껴야 한 곳으로 뭉칩니다.
양자 대결이 되면 위기감이 떨어져 비무에 참가하지 않거나 뿔뿔이 흩어질 가능성이 있소이다.
그리되면 역으로 귀공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소.
철수의사가 최후까지 버텨야 반문 세력이 모두 귀공에게 올 것이오.
막상 비무 당일엔 재야무림의 모든 힘은 재인군을 이길 수 있는 사람에게 집중되게 마련,
당연히 철수의사의 세력은 모의전투 때와는 크게 떨어져 일할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오."

"과연 공의 말씀을 들으니 귀가 번쩍 뜨이는구려.
명심, 또 명심하리다."

이주야(二晝夜)만에 상황은 다시 바뀌었다.
재명공자는 벽에 갇혔다. 그 벽은 완강하다. 결코 그는 벽을 깨지 못할 것이다.
남은 40일 실수만 하지 않으면 지존좌는 내 것이다.
지금 치솟는 내 세력은 다시는 거꾸러지지 않을 정도로 기세가 강하다.
남은 변수는 TV논검비무와 철수의사 뿐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방심은 금물.

철수의사와는 일찍이 뜻을 함께한 사이. 그는 나를 "천진난만한 호걸"이라 불렀다.
그가 재명공자 편에 설 리는 결코 없을 것이나, 만사 불여튼튼.
그에게 모든 것을 줄 것처럼, 서로 합일할 것처럼 해야 한다.
그래야 그를 잡아놓을 수 있다.
그는 재인군과 손을 잡았던 인물.
결정적 순간에 결정적 실수를 반복했던 자,
마지막 순간이 오면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아무도, 심지어 그 자신도 알 수 없다.
차기 지존좌를 그의 선택에 맡겨서는 절대 안 된다.

안철수를 끝까지 천하 삼분지계 속에 가둬놓는 것,
그리고 마지막 순간, 그에게 붙여진 이름 철수의사(義士)란 별명처럼 대의를 위해 장렬히 철수하도록 하는 것.
그게 지존좌로 가는 마지막 걸음이 될 것이다.

 비정 강호에 의미 따위는 없다.
 그곳에 사는 우리에게도 의미 따위는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한다.
 그것에 의미가 없다는 사실마저 의미 따위는 없음에도.
 무림의 의미는 오직 하나,
 강자존.
 (『블리치』에서 패러디)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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