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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훈 칼럼

후보들, 시대정신에서 밈으로 이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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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장훈 중앙대 교수·본사 칼럼니스트

장훈 중앙대 교수·본사 칼럼니스트

칼럼 제목에서 ‘시대정신’에 눈길이 먼저 가는 독자들은 아마도 필자와 같은 시대를 살아오셨을 듯하다. 정치가 시대정신을 담아야 한다고 믿던 세대. 한편 밈(meme)이라는 단어가 먼저 눈에 띄는 분들은 상대적으로 젊은 독자일 듯하다. (원래는 하나의 문화가 살아 있는 존재처럼 세대를 넘어 보존, 전파되는 것을 밈이라 불렀었다. 최근 들어 밈은 온라인에서 모방과 변주를 통해 사람들 사이에 전파되는 생각, 스타일, 행동을 일컫게 되었다.)

최악의 네거티브가 난무하는 이번 대선에서 슬그머니 사라진 것은 시대정신이라는 핵심어다. 여야 후보들은 대동 세상, 공정, 상식 등을 내세우지만 보통의 중도층들이 기대하는 시대정신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엄숙한 시대정신 담론 사라지고
경쾌하고 단순한 밈 던지기 선거
분산, 소통, 개방이 밈의 기반
당선 이후 밈의 정치가 관건

후보들도 안다. 시대정신 같은 거창한 말보다 가볍고 단순한 온라인 밈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이재명 후보는 이달 초에 탈모 치료를 의료보험으로 지원한다는 내용의 동영상으로 대박을 쳤다. 찬반 논란이 없지 않았지만, 동영상 속 이 후보의 표정은 수백 가지의 패러디 영상으로 확장되며 한동안 온라인을 달구었다.

윤석열 후보가 내놓은 59초짜리 동영상, 페이스북 메시지 시리즈 역시 청년 유권자들을 겨냥한 밈 던지기이다. 어제 페이스북 메시지는 ‘주식 양도세 폐지’ 일곱 자였다. 실제 윤 후보의 청년층 지지율은 밈 던지기와 더불어 꾸준히 오르고 있다.

우리 모두 하루에 몇 시간씩 스마트폰에 얼굴을 파묻고 지내는 요즘, 스마트폰 속의 밈이 시대정신을 대체해 가는 흐름을 되돌릴 수는 없다.

다만 필자는 밈 정치는 과연 우리 민주주의를 구할 수 있는가가 궁금하다. 라디오, TV, 이메일이 처음 등장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밈이라는 새로운 소통방식에 대한 찬양과 기대는 차고 넘친다. 내용이 단순해서 쉽게 전달된다. 수많은 이들이 쉽게 참여해서 원래의 콘텐츠를 변형하거나 뒤틀면서 무한 확장되고, 이를 통해 재미와 공감이 퍼져나간다 등등.

그렇다면 밈 던지기에 성공한 새 대통령은 온라인 밈이 상징하는 가치들, 즉 개방, 참여, 창의, 평등의 정치를 열어 갈 것인가? 예전에 시대정신을 내세웠던 선거운동이 하향식이고 엘리트 주도적이었다면, 밈의 정치는 시민들과 대통령 권력이 수평으로 소통하는 세계로 가는 길인가?

두 가지 가능성이 모두 열려 있다. ①첫째, 밈이라는 새로운 방식이 개방, 참여, 창의의 가치와 선순환을 이루면서, 그동안 권력만 움켜쥔 채 경직되어 있던 기성 정치를 바꾸어 가는 희망의 시나리오. ②둘째, 후보들의 밈 던지기는 표를 얻기 위해 잠시나마 젊은 층의 관심을 끌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고 청와대에 들어간 이후에는 다시 과거의 제왕적 권력으로 돌아가는 회색 시나리오.

외국의 사례들을 살펴보면, 밈으로 산뜻하게 출발했다가 흐지부지된 경우는 허다하다. 예를 들자면, 수십 년 만에 터진 엄청난 금융위기(2008년) 속에서 “그래 우리는 할 수 있어(Yes, we can)”라는 희망의 밈을 던졌던 미국의 오바마 후보는 처음에는 소통과 분산의 가능성을 가진 밈 리더로 보였다. 젊은 유권자들과 소외 계층은 오바마가 내뿜는 매력과 결합된 희망의 밈 던지기에 열광하였다. 하지만 백악관에 들어간 후, 공화당의 끝없는 견제와 오바마 본인의 고독하고 고고한 캐릭터가 드러나면서 오바마의 밈은 서서히 사라져갔다.

다시 우리 현실로 돌아와 보면, 결국 우리의 관심은 이번 봄에 선출되는 당선자가 과연 선거 이후에도 밈의 가치, 개방, 소통, 시민참여를 지켜갈 수 있는가에 있다. 우리 유권자들은 이미 여러 차례 부도난 약속을 경험한 바 있다. 선거 운동 기간 중에는 온갖 소통과 분권, 참여를 약속했지만 당선 이후에는 청와대 깊은 곳에 홀로 파묻힌 대통령들을 여러 차례 겪어왔다.

40일 후면 등장하게 될 새 대통령 당선인이 낡은 정치를 청산하고 소통의 밈을 이어가려 할 때 부딪치는 난관은 여러 가지이겠지만, 가장 강력한 난관은 이미 알려져 있다. 바로 여야 정당의 ‘핵관’들이다.

여야 주요 후보 모두 정당정치의 경험이 짧기에 기성 정당에 포진하고 있는 중진의원들이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리기는 어렵지 않다. 수십 년을 갈고 닦은 매끄러운 충성스런 태도와 말솜씨는 대통령의 판단과 시야를 가리기에 충분하다. 실제로 여야 정당의 핵관들이 득세하던 시기에 후보들의 선거운동은 맥락 없는 발언과 시행착오로 어지러웠었다.

정리하자면, 밈이란 그저 스쳐가는 유행은 아니다. 필자를 포함한 기성 세대에게 밈은 일견 가벼워 보이지만, 그 발랄함은 부럽기도, 낯설기도 하다. 하지만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태어난 세대에게 밈은 뻣뻣하게 굳은 채 부스러져 가는 기성 권력의 해체이고 흥겨운 난타이다. 함께 만들어가는 밈 속에서 그들이 주인공이다.

결국 선택은 3월에 등장하는 새 당선인의 몫이다. 선거 때에만 밈을 이용했던 디지털 정치인으로 남을 것인지? 개방과 참여를 통한 밈 리더의 시대를 열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