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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현상의 시시각각

김대업이 건져 낸 김건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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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열린민주당 김의겸 의원이 23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건진 법사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아내 김건희 씨가 오랜 교분이 있었다며 사진과 영상을 공개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열린민주당 김의겸 의원이 23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건진 법사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아내 김건희 씨가 오랜 교분이 있었다며 사진과 영상을 공개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이번 대선의 결정적 장면은 여러모로 김건희씨 7시간 통화가 될 것 같다. 지금까지는 민주당의 기대와 반대로 가고 있다. 녹취 보도가 '게임 체인저'가 되기는커녕 '전복위화(轉福爲禍)'가 됐다. 자당 후보의 지지율은 제자리인데, 상대 당 후보의 지지율만 오른다. 보수 지지자마저 부끄러워하던 김씨의 이름이 당당하게 호명되기 시작했다.

선거판 강렬한 반면교사 된 '병풍' #이를 잊은 채 낡은 네거티브 집착 #절박함으로 포장된 이중성 버려야

민주당은 다급해졌다. 인적 쇄신론을 들고나오는가 하면 '네거티브 휴전'도 제의했다. 며칠 전만 해도 "무능·무식·무당 3무 후보" "굿을 하고 미사일 쏘면 어떡하나"라고 외치던 이재명 후보의 호기는 쑥 들어갔다. 여당으로선 황당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자초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이유가 뭘까.

첫째, 낡은 경로 의존성. 역대 최악이자 최고의 네거티브는 단연 2002년 대선의 병풍(兵風) 사건이다. 범죄였다는 점에서 최악이었지만, 효능에선 최고였다. 역전승을 거머쥔 민주당 입장에선 그렇게 남는 장사가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걸 잃었다. 신용이다. 병풍 이후 민주당이 펼치는 네거티브에는 으레 '제2의 김대업' 딱지가 붙었다. 네거티브는 효과적 선거 전략이지만 제대로 활용하기 힘들어졌다. 2007년 대선의 BBK, 지난해 4·7 재·보선의 생태탕이 먹히지 않은 이유다. 김대업은 대한민국 선거의 강렬한 반면교사가 됐다. 민주당만 이를 모른 채 고루한 승리 방정식에 집착했다.

둘째, 지나치다. 무속이 합리적 정책 판단을 왜곡했는지를 입증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민주당이 "윤석열 후보가 검찰총장 시절 무속인의 말을 듣고 신천지 압수수색을 거부했다"고 고발했다. 누가 봐도 '오버'다. 당시 방역 당국도 부작용을 우려해 강제 수사를 반대했다.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 등 여권 강경파는 무속 논란 확대에 계속 매달린다. 지지층 결집은 몰라도 중도층 확산은 어렵다. 추 전 장관은 그 과정에서 "무속이 윤-김 부부의 성적 정체성을 바꿨다"며 낡은 젠더관만 노출했다. 김건희씨에게 라스푸틴·신돈·최순실의 이미지를 씌우려는 게 민주당 전략이다. 이해는 되지만, 그렇다고 대한민국이 무속 때문에 어떻게 될 허술한 나라는 아니다. 과도하면 "민주당은 진짜 무속의 힘을 믿느냐"는 핀잔만 듣게 된다.

셋째, 이중 기준. "우리 사회도 이제 불순한 의도로 공개되는 사적 내용을 거부하는 성숙한 사회가 됐다고 생각한다." 나무랄 데 없는 '성숙한' 인식이다. 그런데 이런 기준이 김건희씨 통화에는 적용되지 않고, 이재명 후보의 형수 욕설에만 적용된다면? 이 글을 올린 이는 이 후보 캠프에 몸담은 서울대 교수다. 그에 따르면 김씨 통화는 '공적'이고, 이 후보 욕설은 '사적'이다. 황당한 이분법이다. 이런 이중성이 여권 인사들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다. 서너 달 전만 해도 언론윤리 운운하며 언론법 개정을 밀어붙이던 민주당이었다. 그런 당이 제대로 된 언론이라면 생각도 하지 못할 암수로 얻어낸 녹취에 매달려 '한 방'을 기대했다.

민주당 선거 전략에는 '소수파 의식'이 여전히 작동하는 것 같다. 살아남기 위해, 혹은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다소간의 완력이나 술수는 허용될 수 있다는 생각인 듯하다. 나름 절박감이다. 그러나 그런 절박감이 기실은 기득권을 지키려는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시선이 많아졌다. 586 용퇴론이 나오고 있지만, 중요한 건 따로 있다. 보편성을 잃고 부족화한 집단 사고부터 버려야 한다.

결과적으로 김대업이 김건희를 구출한 꼴이 됐지만, 국민의힘도 할 말은 없다. 아무리 사적 대화임을 감안해도 어휘와 사고가 너무 저급하다. 과도한 무속 집착은 윤-김 부부의 정신세계를 의심스럽게 했다. 녹취 방송이 부른 뜻밖의 효과를 '그린 라이트'로 오판해 조심성을 잃는다면 어떤 역풍이 불지 모른다. 선거가 딱 40일 남았다. 어차피 이번 대선은 누가 덜 책잡히느냐가 관건인 졸렬한 선거가 되고 말았다.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