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중대재해법 체크리스트만 400개 “난수표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경제 01면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첫날인 27일 고양시의 건설 현장. 기업은 ‘1호’가 될까 걱정하고 있다. [연합뉴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첫날인 27일 고양시의 건설 현장. 기업은 ‘1호’가 될까 걱정하고 있다. [연합뉴스]

“오늘부터 설 연휴까지 경비원 말고는 아무도 출근하지 않습니다.”

27일 한 건설사 직원 이모씨의 말이다. 중대재해처벌법(중처법)이 시행된 첫날인 이날, 전국 곳곳엔 잠시 멈춘 건설·제조업 현장이 많았다. ‘중처법 적용 대상 1호’가 되는 것을 피하려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대우건설은 이날부터 설 연휴까지 공사를 중단한다. 포스코건설도 사업장에 27일부터 이틀간 휴무를 권장하는 지침을 보냈다. 일부 기업은 협력업체 안전관리 강화 방침도 내놓았다. 도급·용역·위탁 등 계약 형식과 관계없이 대가(임금)를 목적으로 노무를 제공하면 중처법이 적용되는 것을 염두에 둔 조치다.

현대차그룹은 이날 건설·철강 분야 협력업체의 안전 관리 강화를 위해 올해 870억원을 집행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지난해 450억원의 두 배에 가깝다. 현대엔지니어링도 올해부터 공사금액 100억원 이상 협력업체의 안전관리자 선임 인건비를 추가로 지원한다.

하지만 중소기업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안전 예방을 위한 점검조차 제대로 하는 것인지, 이대로 하면 면책이 되는지 힘겨워한다.

고용노동부는 지난해 말부터 중기의 안전보건 관리체계 구축을 위한 체크 리스트를 배포했다. 중기 공통 점검표와 창고·운수업, 폐기물처리업, 도·소매업, 음식점업 등 업종별로 순차적으로 내놨다.

하지만 중소기업은 고용부가 내놓은 자율점검표를 보고 더 혼란에 빠졌다. 점검 항목이 40페이지, 400여 개에 달한다. 진단 항목 80개, 분야별 위험요인 파악 277개 등 공통 체크 리스트만 357개다. 익명을 요구한 울산의 화학업종 중기 경영진은 “이 점검 리스트로 회의도 하고, 현장도 돌아봤다. 결론은 ‘그대로 따라 하기 어렵다’였다”고 호소했다. “해당 법령의 각 조항에 맞게 조치를 하는지 알 수 없는 난수표 같다”(인천 남동공단 기업 경영진)는 얘기도 나온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앞둔 현장 기업인들 말말말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앞둔 현장 기업인들 말말말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특히 산업안전보건법상 분야별 위험요인 점검 항목이 280여 개다. 사다리(22개), 통로(15개), 기계·기구 일반(12개), 지게차(14개), 리프트(15개), 컨베이어(23개) 등이다. 이중 상당수는 기술적인 사항에 해당한다. 전문 기술의 영역이어서 점검 자체가 어렵다는 의미다.

이에 더해 법 규정과 관련이 없는 부수적인 사항까지 점검 항목으로 나열했다. ‘재해 요인 파악 여부’ ‘사고 발생 시 초래 결과 예측 여부’ 등이다. 인천의 중기 관계자는 “사고 발생 시 초래될 결과 예측이라니, 뻔하지 않은가. 공장 문을 닫는 것 아닌가”라고 불만을 터뜨렸다. 산업 안전과 관련 있음 직한 사항을 마구잡이로 몽땅 집어넣은 체크 리스트를 만들고, 그걸 경영 책임 이행 여부를 판단하는 수사 자료로 활용하겠다는 의도가 아니냐는 불만이다.

보다 못한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올해 초 중기를 위한 자율 진단 점검표를 내놨다. 진단 항목이 25개다. 고용부의 80개에 비하면 31%다. 또 점검 항목에 따라 개선·보완해야 하는 방안을 함께 제시한다. 류기정 경총 전무는 “체크 리스트에 너무 많은 조항을 넣으면 지키기 어렵다는 인식을 갖게 돼 오히려 포기하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며 “법 시행 초기에는 각 업종별 특성에 맞게 핵심 기본사항을 중심으로 가이드 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현재로선 누가 낸 점검 항목이 제대로 작동할지 미지수다. 글로벌 로펌인 덴톤스리 법률사무소 전운배 고문은 “법이 시행된 이상 중기도 부담을 감수하더라도 핵심 안전조치는 반드시 개선하려 노력해야 한다”면서도 “현재로선 정부도 경영계도 딱 부러지게 기준을 내놓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안전조치의 적정성을 따지는 기준점은 사안별 수사와 처벌, 판례에 따라 형성될 것이고, 그때까지는 혼란이 불가피할 듯하다”고 덧붙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