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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조선 2000억 소송 보니…사외이사들 떨고 있는 이유 있었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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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에 짙은 안개가 끼어 있다. 거제=송봉근 기자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에 짙은 안개가 끼어 있다. 거제=송봉근 기자

“별주부전에서 토끼가 용궁에 다녀온 기분이지요.”

27일 서울중앙지방법원 동관 460호 법정에서 중앙일보와 만난 전 대우조선해양 사외이사 A씨는 판결 직후 이렇게 심경을 표현했다.

A씨는 이날 대우조선해양 주식 투자자가 자신을 포함한 대우조선 사외이사 5명을 상대로 제기한 2000억원대 민사소송(총 13건)에서 면책 판결을 받았다. 법원이 사외이사들은 대우조선 분식회계 사태에 책임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자칫 소송에서 천문학적인 돈을 물어내야 하는 A씨로서는 ‘용궁에 간 토끼’라고 자신의 처지를 빗댔다.

사외이사 대상 주요 민사소송과 판결. 그래픽 김영옥 기자

사외이사 대상 주요 민사소송과 판결. 그래픽 김영옥 기자

아직 끝나지 않은 대우조선 분식 사태

대우조선은 2012~14년 5조7000억원대 분식회계가 드러나면서 시장에 충격을 줬다. 고재호 전 대우조선 사장과 회계감사를 담당했던 안진회계법인 회계사 등이 징역형 처분을 받았다.

이렇게 형사소송은 지난 2020년 끝났지만 민사소송 60여 건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날 서울중앙지법 제21민사합의부는 주식회사가 회계를 분식한 경우 사외이사가 주식 투자자의 투자 손실을 책임져야 하는지 아닌지를 판단했다.

소송을 낸 건 대우조선 주식 투자자 119명이었다. 분식회계가 명백한 상황에서, 사외이사도 민사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사외이사는 기업 경영을 감시하기 위해 이사진에 합류한 외부 전문가다.

상법에 따라 사외이사는 이사회에 참석해 기업의 주요 경영방향을 결정하고 감사 활동을 병행한다. 대우조선이 허위로 발표한 재무제표를 사외이사가 적절히 감사하지 않았다는 것이 원고 측의 주장이다. 분식회계로 판명 난 감사보고서에서 사외이사는 ‘회사(대우조선해양)의 재산 및 손익 상태를 적정하게 표시하고 있다’고 기재·서명했다.

반면 사외이사 측은 대우조선의 재무제표가 허위인지 몰랐다고 반박했다. 자본시장법은 ‘선량한 관리자로서 상당한 주의를 했는데도 이를 알 수 없었음을 증명’하면 사외이사의 손해배상 책임이 없다고 규정한다. 입증 책임은 사외이사에게 있다.

검찰 부패범죄특별수사단이 지난 2016년 대우조선해양 본사와 경남 거제시 옥포조선소 등에 수사관 150여명을 파견해 압수수색을 벌였다. [중앙포토]

검찰 부패범죄특별수사단이 지난 2016년 대우조선해양 본사와 경남 거제시 옥포조선소 등에 수사관 150여명을 파견해 압수수색을 벌였다. [중앙포토]

이날 법원은 ▶사외이사들이 본인의 직무에 최선을 다했고 ▶여러 사정을 종합했을 때 분식회계를 인지하기 어려웠다고 판단했다.

주목할 대목은 법원 판결의 직접적인 근거가 된 ‘상당한 주의’다. 법원은 이사회 의사록을 살폈다. 사외이사진이 제 역할을 했는지 판단하기 위해서다. 판결에 따르면, 대우조선 사외이사는 재직 기간 이사회에 거의 대부분 참석했다.

사외이사 직무를 충실히 수행했다는 점도 증명했다. 이사회에서 경영진이 월간 실적을 제출하면, 재무상황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해결 방안을 구체적으로 질의했다. 예컨대 당시 해양플랜트 부문에서 손실이 발생하자, 사외이사들은 김갑중 당시 대우조선 재무총괄부사장(CFO)에게 이유를 묻고 ‘공사 손실 충당금을 반영하고 있다’는 해명도 들었다.

법원은 사외이사가 재무제표를 허위라고 믿을 근거가 있는지도 따졌다. ‘가짜 재무제표’라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한 것은 아닌지 판단하기 위해서다.

법원은 대우조선 전직 경영진이 사외이사를 속였다고 판단했다. 경영진은 총공사 예정원가를 임의로 조정하거나 공사손실 충당금을 보고서에서 삭제했다. 대신 분식한 회계의 신뢰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만 사외이사에게 제출했다.

먹구름이 내려앉은 거제도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건조 중인 LNG선의 모습이 보인다. [중앙포토]

먹구름이 내려앉은 거제도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건조 중인 LNG선의 모습이 보인다. [중앙포토]

“제 역할 못했다면 면책 받을 수 없어”

대주주인 한국산업은행도 공범이었다. 산업은행이 선임한 CFO는 사외이사에게 분식회계를 숨겼다. 결국 사외이사들은 대우조선의 분식회계를 알 수 없었다는 것이 법원이 판단이다.

신광식 전 대우조선 사외이사(한국개발연구원(KDI) 초빙연구위원)는 “다행히 이사회 의사록이 모두 녹취돼 있었고, 감사위원회 회의 내용도 의사록이 존재했기에 소송에서 방어가 가능했다”고 말했다.

다만 법원은 모든 대기업 사외이사의 면책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유승정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명백한 분식회계에도 불구하고, 사외이사가 ‘상당한 주의’를 다했다면 손해배상 책임을 지지 않는다”며 “거꾸로 보면 사외이사가 이사회에서 제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결코 면책 받을 수 없다는 해석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그동안 강원랜드, 부산2저축은행 등에서 소액주주가 사외이사를 상대로 낸 소송을 내서 수십억원대 배상 판결을 받은 바 있다.〈도표 참조〉

이날 원고 측은 항소 여부를 묻는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한편 서울지법은 지난해 대우조선 소액주주와 기관투자가가 낸 민사소송에서 고재호 전 대표, 김갑중 전 CFO, 안진회계법인에게 146억~612억원을 각각 지급하라고 판결한바 있다. 양측 모두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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