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목잘라 끌고갔다…짜장면 세그릇에 팔려간 그녀의 복수

중앙일보

입력 2022.01.27 16:19

업데이트 2022.01.27 19:57

27일 개봉한 영화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미군 기지촌 위안부 출신인 박인순이 스스로의 복수 이야기를 써내려가며 저승사자에 맞서는 여정을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풀어낸다. [사진 시네마달]

27일 개봉한 영화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미군 기지촌 위안부 출신인 박인순이 스스로의 복수 이야기를 써내려가며 저승사자에 맞서는 여정을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풀어낸다. [사진 시네마달]

철거를 앞둔 의정부 산곡동 뺏벌 마을에 저승사자 무리가 찾아온다. 한때 미군 기지촌이었던 뺏벌은 죽어서도 승천 못 한 귀신이 많다. 살아서고 죽어서고 인생사를 제대로 기록한 명부가 없는 탓에 저승에서 안 받아줘서다. 뺏벌에서 귀신들과 엉켜 사는 박인순씨도 비슷한 처지다.

미군 기지촌 여성 담은 기이한 우화
영화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만든
부부 다큐 감독 김동령·박경태씨

생존 여성이 미군에 복수극 직접 연기
명부 없어 저승 못 가는 무연고 죽음들
"기지촌 무연고 유골 산업폐기물로 버려져
망자 이야기 영화로라도 남기려 했죠"

그는 한국전쟁 때 고아로 버려져 서울역에서 자장면 세 그릇에 파주 미군 기지촌에 팔려갔다. 포주는 동네에 죽은 1945년생 박인순의 호적을 사서 그의 가짜 신분을 만들었다. 진짜 나이, 고향은 알 수 없었다. 미군 부대가 이전하면서 뺏벌로 옮겨온 그는 미군과 결혼하며 미국에 가 출산까지 했지만, 남편의 폭력에 못 이겨 가출했다가 복수하러 찾아간 후 기억을 잃은 채 행인에게 발견됐다. ‘뺏벌’이란 단어만을 기억해내 한국에 간신히 돌아왔다. 귀신이 된 옛 동료들을 데려가려는 저승사자들에 맞서 박인순은 자신만의 복수극을 준비한다.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 첫 공개 당시 “귀기와 미감이 가득한 매혹적 상태”(정한석 프로그래머)라 호평받고 이듬해 네덜란드 로테르담영화제 밝은 미래 부문에 초청됐던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가 오는 27일 개봉한다. 영화는 실제 미군 위안부 출신 박인순씨의 조각난 기억을 밑그림 삼아 그가 일생 바랐던 복수를 완성하는 신화적 여정을 좇는다. 20년째 미군 기지촌을 다큐멘터리에 담아온 김동령(45)‧박경태(47) 감독 부부가 박씨와 함께 만든 세 번째 작품이다.

김동령 감독(왼쪽)과 박경태 감독. [사진 시네마달]

김동령 감독(왼쪽)과 박경태 감독. [사진 시네마달]

기지촌 여성들의 삶과 미술 심리 치료 과정을 그린 박 감독의 데뷔작 ‘나와 부엉이’(2000), 부부가 첫 공동 연출한 전작 ‘거미의 땅’(2016)에 이어서다. 다큐와 극영화의 경계를 무너뜨린 환상성은 박인순씨가 그린 그림에서 따온 것이다. 전문 연기자와 더불어, 실존 인물이 직접 자신의 배역까지 연기한 대목은 일종의 심리치료극 같은 인상도 준다. 미군 기지촌에 관한 다큐로는 낯선 시도다. 두 감독을 25일 화상 인터뷰로 만났다.
“인순 언니는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데 아주 옛날부터 자기 집 벽이나 흙바닥에 그림을 많이 그렸대요. 희한한 나무‧새‧도깨비까지 온갖 것들이 임신한 상태가 많아요. 인순 언니가 낙태 경험이 많아서 과거 기억에 영감 받지 않았나 싶은데 ‘왜 이렇게 그렸냐’고 물으면 대답이 짧아요. 그런 고통은 말을 안 하고 ‘생각대로 그린거야’ 하죠. 이번 영화 제목도 인순 언니가 20년 전 그린 그림 제목에서 빌려왔어요.”(김동령 감독)

고속도로 뚫자 옛 기지촌서 무연고 유골들 쏟아졌다  

작품을 처음 구상한 2014년만 해도 여느 다큐에 가까웠다. 김 감독에 따르면 원래 박인순씨가 미국에 두고 온 딸을 찾아가는 내용. 두 감독이 시카고에 있던 박씨의 딸을 찾아 모녀가 화상 통화 상봉까지 했지만 박씨 딸의 개인 사정이 악화되며 연락이 두절됐다. 다른 방식의 이야기를 고민할 당시 박씨는 자꾸 꿈에 죽음이 나온다고 말하곤 했다.

영화는 한때 미군과 결혼해 미국에 갔지만 남편의 학대와 폭력에 복수하려다 기억을 잃은 채 기지촌으로 돌아온 박인순씨의 여정을 현실과 상상을 넘나들며 뒤좇는다. [사진 시네마달]

영화는 한때 미군과 결혼해 미국에 갔지만 남편의 학대와 폭력에 복수하려다 기억을 잃은 채 기지촌으로 돌아온 박인순씨의 여정을 현실과 상상을 넘나들며 뒤좇는다. [사진 시네마달]

그 무렵 박인순씨가 사는 뺏벌엔 큰 변화가 있었다. 고속도로 공사였다. 박 감독은 “2014~2015년쯤부터 고속도로 공사를 하면서 야산에서 뼈가 많이 나왔다. 동네 머슴 하던 분들이 옛날에 기지촌 아가씨들이 죽으면 포주가 지게에 지고 가서 파묻게 했다더라”면서 “기지촌 여성의 무연고 묘가 문득 이렇게 튀어나오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파주 임진강 유역, 철원까지 1950~1960년대 비가 많이 오면 강에 버리고 하면서 이름 없이 죽어간 유골이 몇 사람인지도 모르게 엉켜있다. 인부들이 산업폐기물로 버려 공사장에서 뼈를 던지고 놀았다는 말을 듣고 영화로라도 만들어 그분들 이야기를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미군에 복수해 잘린 목 끌고 가는 장면…영화 속 한풀이

박 감독은 “인순 아주머니가 요구한 영화적 장치도 있다”면서 “꼭 미군에게 복수해서 자기가 그 목을 끌고 가야 한다는 거랑 자기가 죽을 때가 다 됐는가 저승사자들이 나타난다는 것. 이것이 가능하면 영화를 찍겠다고 강력히 말씀하셨다. 2018년 8개월간 사전 준비를 토대로 두 달 반 동안 오늘 촬영이 끝나면 다음 촬영 사이 이야기를 만들어나갔다”고 돌이켰다. 잘린 목을 끌고 지옥 관문까지 아홉 고개를 넘는 극 중 박인순의 이야기가 탄생한 배경이다. 제대로 된 수사 없이 무연고 사망 처리된 기지촌 귀신 ‘꽃분이’가 박인순과 동행한다.
영화 말미엔 1992년 동두천 기지촌에서 주한미군 케네스 마클에게 처참하게 살해된 윤금이씨 사진도 나온다. 기지촌 동료들의 신고로 세간에 알려진 사건이다. 알몸 시신에 콜라병‧우산 등이 박힌 이 처참한 사진은 한때 반미운동의 상징으로 동원되며 피해 여성을 전시하는 2차 가해란 비판도 받아왔다. 김 감독은 “여성 신체에 가해진 폭력을 전시하지 말라는 시대의 요구로 금기의 이미지가 됐는데 지금이야말로 이 사진을 제대로 보는 작업이 필요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면서 “사람들이 ‘윤금이’가 본명이라고 많이 생각하는데 사실 가명이다. 본명은 알려지지 않았다. 기지촌 여성들의 무명의 죽음을 다룬 이 영화 속 꽃분이 귀신처럼 폭력적으로 사라진 존재였고, 사진이 증명하는 폭력성의 깊이가 카운터펀치처럼 영화에 균형을 잡아주지 않을까 했다”고 돌이켰다.

전작 다큐 보기 힘들어했던 박인순씨, 이 영화 통쾌했던 이유

망자를 저승에 수송하는 '임무'를 위해 제대로 된 삶의 기록이 없는 기지촌 귀신들에게 그럴 듯한 이야기를 붙여 데려가려는 영화 속 저승사자들의 행태는 기지촌을 취재나 연구 목적의 '아이템'으로 대하는 미디어와 학자들의 태도와 겹쳐진다. 두 감독이 자기 비판을 더해 새겨넣은 설정이다. [사진 시네마달]

망자를 저승에 수송하는 '임무'를 위해 제대로 된 삶의 기록이 없는 기지촌 귀신들에게 그럴 듯한 이야기를 붙여 데려가려는 영화 속 저승사자들의 행태는 기지촌을 취재나 연구 목적의 '아이템'으로 대하는 미디어와 학자들의 태도와 겹쳐진다. 두 감독이 자기 비판을 더해 새겨넣은 설정이다. [사진 시네마달]

“인순 아주머니와 20년 가까이 되다 보니까 먼 친척처럼 가까워졌다”는 박 감독은 이번 작품의 성과로 전작들과 달랐던 박인순씨 반응을 들었다. “스스로 욕망을 통해 이야기를 만드는, 창조주의 역할을 공유해서인지 부산영화제에서 영화를 보며 통쾌하고 좋아하셨다”고 소개했다.
 가령 “전작인 다큐 ‘나와 부엉이’는 성매매 여성들을 기존 저널리즘 방송처럼 편견의 눈으로 찍지 않겠다는 걸 목표로 인순 아주머니의 일상에 초점을 뒀고 미술 심리 치료로 치유되는 과정을 담아 영화를 본 사람들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을 받곤 했지만 정작 인순 아주머니는 보기 힘들어했다"고 했다. 자신의 현실은 여전히 비참하고 변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엔 달랐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외부에서 보기엔 판타지지만 역설적으로 인순 아주머니에겐 있는 그대로의 자기 욕망, 진실이니까요.”
두 감독은 다음 작품도 공동 연출한다. 텍사스의 한 미군이 1969~1970년 주한 미군 시절 기지촌 풍경을 8㎜로 찍어 간직해온 2시간 반가량 필름을 아카이브 다큐 방식으로 풀어낼 예정이다. 김 감독은 “그 당시 기지촌 여성들이 어땠는지, 어떤 사람들이 이 여성들을 통해 먹고 살았는지 적나라한 풍경이 담겨 있다. 일본 NHK 방송 관계자도 자기들이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아카이브를 갖고 있지만 이런 건 본 적 없다더라”면서 “그 시절 기지촌에서 노동이란,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관해 이야기하려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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