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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크리스트만 400개 "난수표냐"…중소기업, 중대재해법 멘붕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산업 현장에서 근로자 사망 등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경영책임자를 처벌하는 내용의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두고 17일 대전지방노동청에서 직원들이 사업주에게 전달할 중대재해처벌법 안내 책자와 관련 자료를 준비하고 있다. 뉴스1

산업 현장에서 근로자 사망 등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경영책임자를 처벌하는 내용의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두고 17일 대전지방노동청에서 직원들이 사업주에게 전달할 중대재해처벌법 안내 책자와 관련 자료를 준비하고 있다. 뉴스1

중대재해처벌법이 27일 시행에 들어갔다.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대표이사가 징역형과 같은 무거운 처벌을 받는다. 경영 결정권자의 공백은 기업의 존폐로 이어진다. 법 시행 전에 재해를 예방하려 산업현장은 비상상태로 임했다. 하지만 혼란은 여전하다. 특히 중소기업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안전 예방을 위한 점검조차 제대로 하는 것인지, 이대로 하면 면책이 되는지 힘겨워한다.

고용노동부는 지난해 말부터 중소기업의 안전보건 관리체계 구축을 위한 체크 리스트를 배포했다. 중소기업 공통 점검표와 창고·운수업, 폐기물처리업, 도·소매업, 음식점업 등 업종별로 순차적으로 내놨다. "중대재해처벌법 규정이 모호해 어디서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중소기업의 호소에 답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중소기업은 정부가 내놓은 자율점검표를 보고 시쳇말로 멘붕에 빠졌다. 점검 항목이 40페이지, 400여 개에 달한다.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 현황 진단 항목 80개, 분야별 위험요인 파악 277개 등 공통 체크 리스트만 357개다. 울산의 중소기업(화학업종) 경영진은 "정부가 배포한 중대재해 예방을 위한 점검 리스트로 회의도 하고, 현장도 돌아봤다. 결론은 '그대로 따라 하기도 어렵다'였다"고 호소했다.

고용부가 제시한 점검표에는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을 위한 진단 항목(80개) 외에 산업안전보건법상 분야별 위험요인 점검 항목이 280여 개다. 사다리(22개), 통로(15개), 기계·기구 일반(12개), 지게차(14개), 리프트(15개), 컨베이어(23개) 등이다. 경영 책임자의 관리상 조치 의무와 직접 연관된다고 보기 힘든, 현장의 즉흥적이고 즉각적인 대응이 필요한 내용이 수두룩하다.

특히 분야별 위험요인 점검 항목 중 상당수는 기술적인 사항에 해당한다. 자체 점검으로 해결해야 하는데, 전문 기술의 영역이어서 점검 자체가 어렵다는 의미다. 재정 상태가 열악한 중소기업은 안전관리자를 따로 선임하기 힘들다. 그래서 정부도 반드시 안전관리 최고 책임자(CSO)를 선임해야 하는 대기업과 달리 300인 미만 사업장에는 안전관리자를 외부에 위탁할 수 있도록 했다. 외부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셈이다. 물론 이에 따른 부담은 온전히 중소기업의 몫이다. 재정 상태를 감안한 정부의 배려가 사실은 부담을 기정사실로 하는 꼴이다. 중소기업에 대한 안전 관련 재정 지원과 무상 점검 조치가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앞둔 현장 기업인들 말말말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앞둔 현장 기업인들 말말말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고용부의 체크 리스트가 오히려 법과 혼란을 일으키는 항목도 수두룩하다. 체크 리스트 목차부터 법령상 조항과 다르게 분류돼 있다. "해당 법령의 각 조항에 맞게 조치를 하는지 알 수가 없는 난수표 같다"(인천 남동공단 기업 경영진)는 얘기가 나온다. 또 법 규정과 관련이 없는 부수적인 사항까지 점검 항목으로 나열해놨다. 예컨대 시행령 제4조 제8호에는 '중대산업재해 발생 대비 매뉴얼 마련 여부'와 '매뉴얼에 따라 조치하는지 반기 1회 점검 여부'를 이행토록 하고 있다. 법적 요건이다.

한데 고용부의 체크 리스트에는 여기에 더해 '재해 요인 파악 여부' '사고 발생 시 초래 결과 예측 여부' 등 부수적인 내용을 포함해 11개 항목을 점검토록 했다. 인천의 중소기업 관계자는 "사고 발생 시 초래될 결과 예측을 하라는데, 그건 뻔하지 않은가. 공장 문을 닫는 것 아닌가. 뭘 예측하라는 것인가"라고 불만을 터뜨렸다. "이런 체크 리스트를 들이밀고 나중에 사고라도 나면 그걸 이행하지 않았다고 형사처벌하겠다는 것 아닌가"라고 덧붙였다. 말 그대로 산업 안전과 관련된다고 생각하면 마구잡이로 집어넣어 체크 리스트를 만들고, 그걸 경영 책임 이행여부를 판단하는 수사자료로 활용하겠다는 의도 아니냐는 불만이다.

보다 못한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중소기업을 위한 자율 진단 점검표를 올해 초 내놨다.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을 위한 진단항목이 25개다. 고용부의 80개에 비하면 31%다. 법령 조문 순서와 내용을 그대로 반영해 구성돼 있다. 법에서 요구하는 체계를 직관적으로 판단하고 점검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 점검 항목에 따라 개선·보완해야 하는 방안을 함께 제시하고, 의무 이행에 필요한 서류 양식을 제공하고 있다. 현실 적용성에서 앞선다는 평가다. 류기정 경총 전무는 "체크 리스트에 너무 많은 조항을 넣으면 지키기 어럽다는 인식을 갖게 돼 오히려 포기하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며 "법 시행 초기에는 중소기업들이 잘 적응하고 따라갈 수 있도록 각 업종별 특성에 맞게 핵심 기본사항을 중심으로 가이드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고 말했다.

현재로선 어느 곳에서 낸 점검 항목이 제대로 작동할지 미지수다. 글로벌 로펌인 덴톤스리 법률사무소 전운배 고문은 "법이 시행된 이상 중소기업도 부담을 감수하더라도 핵심 안전조치는 반드시 개선하려 노력해야 한다"면서도 "현재로선 정부도 경영계도 딱 부러지게 기준을 내놓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전 고문은 "따라서 안전조치의 적정성을 따지는 기준점은 사안별 수사와 처벌, 판례에 따라 형성될 것이고, 그때까지는 혼란이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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