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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진중권 칼럼

진중권 "한 여고생 위문편지 일탈···젊은 남성들 발끈할만 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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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초등학교 시절의 일이다. 숙제로 위문 편지를 썼는데, 누이들이 그걸 읽고 자지러진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휴전선에 계신 파월 장병 아저씨...(중략) 아저씨의 명복을 빕니다.” 월남에 파병되어 휴전선을 지키는 군인에게 명복을 비는 초현실주의적인 상황. 얼마나 우스웠겠는가.

이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한 젊은이가 다짜고짜 쌍욕이 섞인 댓글을 단다. ‘군인에게 명복을 빈다고 한 게 뭔 자랑이라고 이런 데에 올리냐.’ 초등학생이 억지로 편지의 공백을 메꾸려고 이런저런 상투어를 쓰다가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얘기에 왜 그렇게 흥분을 하는 것일까.

한 여학생 일탈에 남성들 집단반응
여성을 경쟁자로 인식하기 때문
페미니즘을 위협으로 느끼고 공격
젠더갈등 속 성평등은 조금씩 진전

궁금해서 ‘군대는 다녀왔냐’고 물었더니, 미필이고 곧 입대할 예정이란다. 다녀오지도 않은 군대를 왜 그렇게 신성시할까. 군인들의 헌신에 대한 감사에서 나온 행동은 아닌 것 같다. 만약 그랬다면, 18개월짜리 병역도 안 마친 처지에 군사정권 시절 30개월 복무한 선배 군인에게 쌍욕을 했겠는가.

이는 미국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군에 대한 존경’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우리 세대에게 ‘병역’이란 그저 국민이니까 해야 할 의무에 불과했다. 하지만 요즘의 젊은이들에게 병역은 그 이상의 각별한 의미를 갖는 듯하다. 그들은 병역이 제 실존적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고 믿는다.

왜 그럴까? 우리 세대만 해도 여성은 아예 남성의 경쟁자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요즘의 젊은 남성들은 곳곳에서 여성을 경쟁자로, 그것도 매우 위협적인 상대로 체험한다. 이런 상황에서 군대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도덕적 우위를 절대적으로 보장한다. 여성은 징집 당할 일이 없잖은가. 젊은 남성들은 바로 그 부분을 여성집단에게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래야 자존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병역미필의 젊은이가 병역을 필한 중년의 사내에게 그렇게 무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사이에서 생물학적으로는 남성인 내가 젠더상으로는 여성(‘남페미’)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한 여고생의 위문편지가 그렇게 큰 파장을 일으킨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어떻게 보면 별것 아닌 일이다. 모든 여학생이 그 짓을 한 것도 아니고, 그 여학생이 여학생 집단을 대표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한’ 여학생이 억지로 위문 편지를 쓰다가 짜증이 나서 철없는 짓을 한 것뿐이다. 그런데도 한 ‘개인’의 일에 남성들이 ‘집단’으로 뭉쳐 반응을 했다. 왜 그랬을까? 이유가 있다. 하필 그들이 그토록 존중받고 싶어 하는 대상집단(여성)의 일원에게, 하필 그들이 그토록 존경받고 싶어 하는 그 부분(병역)을 조롱받았으니, 아마도 자신들의 전 존재를 부정당한 느낌이었을 게다.

사실 ‘군대에 다녀왔다’는 남성들의 우월감은 우리 세대에도 있었다. 이상한 것은, 군복무 기간은 30개월에서 18개월로 줄어들었는데, 그 우월감에 대한 집착은 외려 더 강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요즘 젊은이들의 의식이 우리 세대보다 더 남성우월주의적이어서? 우리 운동권 세대에게 ‘페미니즘’ 자체를 부정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 그런데 요즘 젊은 남성들은 그 일을 서슴없이 한다. 그 일에 얼마나 열정적인지, 마치 ‘페미 타도’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런 그들의 행태가 우리의 눈에는 그저 ‘퇴행’으로 보인다.

정말 이 사회가 과거로 돌아가고 있는가? 아니다. 사실 ‘성평등의식’이라는 면에서 젊은 세대가 우리 세대보다 낫다. 우리 세대가 젊은 남성들보다 페미니즘에 우호적인 것은 정말로 여성에 친화적이어서가 아니다. 그저 살면서 페미니즘을 진지한 ‘위협’으로 느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페미니스트들은 이 상황에 절망할 필요가 없다. 안티페미니즘의 목소리가 높은 것은 그만큼 페미니즘이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 나 같은 운동권 아재들은 페미 타도를 외치는 젊은 남성들을 나무랄 자격이 없다. 적어도 그들은 여성을 진지한 경쟁상대로 여기기 때문이다.

남성우월주의가 압도적 시대에 운동권 남성들은 별 주저 없이 페미니스트들을 ‘연대’의 대상으로 여겼다. 페미니즘을 외치는 여성들 옆에 서 있으면 ‘진보적’이라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페미니즘을 외쳐도 남성들의 우월적 지위가 위협받는 일은 결코 없었고, 지금도 그런 일은 없다.

젊은 남성들은 다르다. 그들은 여성들을 경쟁자로, 페미니즘을 위협으로 느낀다. 그리고 이 경쟁과 위협이 계속되리라는 것을 안다. 앞으로 중년이 되고 노년이 되어도 꼰대들이 지금 누리는 이 우월적 지위를 자신들은 누릴 수 없을 것이라 막연히 예감한다. 그러니 차라리 이쪽이 더 진보적이지 않은가.

이른바 ‘젠더 갈등’은 어차피 이 사회가 성숙하는 과정에서 겪어야 할 일이다. 페미니즘과 안티페미니즘은 동전의 양면. 안티페미의 요란한 구호의 뒷면에는 성평등의 조용한 진전이 있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는 법. 어느 나라에서나 성평등의 의미 있는 진전에는 늘 반작용이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