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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조강수의 시선

일그러진 검사의 초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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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조강수
조강수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불법 출국금지에 관여한 혐의를 받는 이규원 검사가 지난 21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재판을 마친 뒤 법정을 나서고 있다. 이 검사는 '별장 성접대' 사건의 윤중천씨 등 2명의 면담결과서를 허위로 조작한 혐의로도 재판에 넘겨졌다. 그간 공정거래위원회에 파견됐다가 그제 정기 인사에서 춘천지검 부부장검사로 전보됐다. [연합뉴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불법 출국금지에 관여한 혐의를 받는 이규원 검사가 지난 21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재판을 마친 뒤 법정을 나서고 있다. 이 검사는 '별장 성접대' 사건의 윤중천씨 등 2명의 면담결과서를 허위로 조작한 혐의로도 재판에 넘겨졌다. 그간 공정거래위원회에 파견됐다가 그제 정기 인사에서 춘천지검 부부장검사로 전보됐다. [연합뉴스]

"그 사람들은 모르는 거 같아요. 이건 사람 인생이 달린 일이라는 걸요. 자기가 저지르지도 않은 죄 때문에 날마다 감옥에서 보내는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검사가 돼서 편하게 잠이 옵니까. 손톱만큼의 무죄 가능성이 있어도 그러면 안 되는 거죠."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네 번째 재판'(4th trials)을 몰아보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매사추세츠주 대(對) 숀 엘리스 재심 사건. 로즈메리 스캐피치오 변호사의 쓴소리가 남의 나라 일 같지 않았다. 1993년 9월 26일 새벽, 보스턴 경찰서 마약 전담반의 백인 형사가 얼굴에 5발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19세 흑인 청년 2명이 공범으로 기소됐다. 검경은 "처형 방식의 트로피 살인이며 총기와 목격자 증언이 확보됐다"고 주장했다. 변호인단은 "이건 (급조된) 사냥"이라고, 줄곧 무죄를 주장한 숀은 "자기들이 그러고 싶다고 나를 감옥에 보내려고 했다. 힘이 있었으니까. 나를 감옥에 가둬도 아무도 몰랐을 수 있다"라고 반박했다. 종신형을 선고받은 숀의 재심 신청이 복역 22년 만에 받아들여지고 재심 직전 석방된 실화가 기반이다.

넷플릭스 다규멘터리 '네번째 재판'의 주인공 숀 엘리스. 1급 살인 혐의로 22년 복역한뒤 재심이 받아들여지며 극적으로 석방돼 자유의 몸이 됐다. 보스턴 경찰국 형사들이 마약상 등을 치는 부패 경찰이었던 것으로 드러나며 "증거가 오염돼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했다"고 법원이 판단해서다. [인터넷 캡처]

넷플릭스 다규멘터리 '네번째 재판'의 주인공 숀 엘리스. 1급 살인 혐의로 22년 복역한뒤 재심이 받아들여지며 극적으로 석방돼 자유의 몸이 됐다. 보스턴 경찰국 형사들이 마약상 등을 치는 부패 경찰이었던 것으로 드러나며 "증거가 오염돼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했다"고 법원이 판단해서다. [인터넷 캡처]

 편하게 잠자는 검사는 국내에 적지 않다. 사냥하는 검사도 보인다. 2014년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에 이어 이번 정부에서 진술 조작, 사건 조작의 망령이 꿈틀댄 것도 사냥의 욕심 때문으로 보인다.
 "허위공문서 작성 및 행사, 공무상 비밀 누설,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업무방해...."
 7가지 범죄 혐의가 나열된 공소장의 피고인명은 이규원, 현직 검사다. 동료 검사가 밝혀낸 악행을 살펴보자. 2018~2019년 대검 과거사 진상조사단 단원으로 파견 나가 일하면서 ① '별장 성접대 의혹' 수사 착수 직전 출국하려던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에 대해 가짜 사건번호를 동원해 불법 출금 ②물적 증거가 없음에도 수사 처분 과정, 차관 임명 과정 등에 곽상도 전 의원 등의 부적절한 개입이 있었고 윤석열 전 검찰총장, 윤갑근 전 대구고검장 등이 윤중천씨와 유착관계가 있다고 단정한 다음, 윤씨와 박관천 전 청와대 행정관의 진술을 가공해 허위 면담결과서 작성 ③면담결과서 내용을 언론에 유출, 수사 필요성 국면을 조성한 후 과거사위에 보고해 실제 수사로 이어짐.
 정의 구현과 피의자 인권 보호를 양날의 사명으로 하는 검사가 저지른 범죄라고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수준이다. 이로써 현 정부가 공을 들여 쌓아 올린 권력기관 개혁의 정당성을 파견 검사 한 명이 무너뜨린 결과가 되고 말았다. 한 검사의 말이다.
 "문재인 정부의 지난 5년 동안 가장 뼈아픈 사건이 김학의 수사일 것이다. 2019년 3월 대통령 지시로 시작됐으나 불법 출금, 수사 무마 사건의 부메랑이 돼 친여 성향 검사들에 큰 상처를 입혔다. 이 검사는 더 추락했다. 거짓말을 지어내 청와대와 대척점에 서 있던 검찰 간부와 야당 의원을 수사 대상으로 몰아간 게 드러나면서다. 나중에 아무것도 안 나올지언정 수사받는 고통이라도 겪게 할 의도였다면 그 순간 검사라고 부르기도 어렵지 않나."
 공소장에 나타난 진술 가공 과정은 섬뜩하다. 이 검사는 윤씨에 대한 세 차례 면담에서 검찰 고위 관계자들에게 현금을 줬는지, 원주 별장에 온 사실이 있는지를 집요하게 캐물었다. 윤씨는 "아무런 친분이 없다"고 답했다. 그런데도 면담결과서에 "각각 수천만원씩 현금을 준 적도 있는데" "원주 별장에 온 것도 같다"라고 허위로 기재하거나 애매한 표현을 단정적 진술로 가공했다. 이 검사의 물밑 맹활약에 의탁해선지 대통령은 진상 규명을 지시했고 검찰과거사위는 수사 권고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검찰 수사 결과는 맹탕이었다. 이 검사가 소설을 썼기 때문이라는 게 공소장의 결론이다. 그는 이 사건으로 대검에서 정직 6개월의 징계 처분을 받은 상태다.
 가장 섬뜩한 것은 이 검사가 조작한 보고서 내용을 반박할 증거나 알리바이가 없었다면 누군가 억울한 옥살이를 했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 검사의 정의 구현은 김 전 차관과 일부 검사들의 감옥행이었을지 모른다. 정의를 구현하고 싶었다면 적법 절차를 따랐어야 했다. 불법임을 알았다면 어느 지점에서 멈췄어야 했다. 과거사위에는 브레이크 시스템이 없었다.

진술 조작 기소된 이규원 검사 #정의 구현한다며 민간인 '사냥' #미국 다큐 '네 번째 재판'의 교훈 #힘 있다고 범죄로 꾸미면 되나

 왜 그랬을까, 혼자 했을까. 마지막으로 맞닥뜨리는 의문이다. 사명감, 출세욕, 충성심, 청와대 기획사정설? 조병화의 시 한 줄에 답이 있을지 모른다.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당신이 무작정 좋았습니다.’ 맹목적 사랑의 결말은 비극적이다. 검사가 법치의 개울을 떠나 정치의 강가에서 노닐면 필시 썩는다. 한 번쯤 거울 앞에 서서 스스로 사냥하는 검사는 아닌지 돌아보길 권한다.

조강수 논설위원

조강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