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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혁의 한반도평화워치

원조 두 배로 늘려 ‘매력 코리아’ 브랜드 만들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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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진정한 선진국으로 가는 길

이혁 전 주베트남 대사

이혁 전 주베트남 대사

15년 전 미국 워싱턴DC의 저녁 모임에서 한국에 오래 근무했던 미국의 전직 외교관이 “한국은 ‘건설적 비관주의(constructive pessimism)’를 가진 사람들이 사는 나라”라고 말했다. 실제 한국 사람은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기 때문에 미래에 대비하려는 강한 생존 본능이 몸에 배어 있다.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전력을 다했기 때문에 한국은 엄청난 성취를 이루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2020년 기준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3만1638달러로, 선진 7개국(G7)에 속하는 이탈리아(3만1604달러)를 앞질렀다.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극심한 빈곤국이었던 한국이 이룬 경이로운 성과다.

국민소득 대비 대외 원조 0.15% 그쳐 … 중국의 절반도 안돼
최빈국에서 도약한 경험 살려 세계와 함께하는 한국 심어야
경제 활기, 남을 돕는 온기, 문화 향기 3박자가 국격의 조건
빈곤 퇴치, 기후변화, 전염병 등 지구촌 문제 해결에 나서야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도 한국인의 내면에 깊이 자리 잡은 심리는 언제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움이 아닐까?

선진국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9개 회원국 중 한국은 행복도와 출산율은 가장 낮고, 자살률은 가장 높다. 미국 여론조사 기관 퓨리서치 조사에서는 17개 대상국 중 가족보다 돈이 더 중요하다고 답한 유일한 국민이 한국인이다. 모든 걸 경쟁으로 생각하고 물질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남에 대한 배려, 함께 잘살자는 공생의 정신이 결여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일지 모른다.

경제는 급성장했지만 행복지수는 바닥

한반도평화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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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많은 위대한 인물이 자기 삶의 모토로 열정과 온정을 꼽는다. 자신의 목표 달성을 위한 열정은 넘치지만, 남을 연민하고 도우려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없으면 세속적으로 성공해도 품격을 갖춘 인물이 아니다.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큰일을 이룬 사람 중에는 출중한 능력보다 고결한 인품이 결정적인 성공 요인이었던 사례가 드물지 않다.

냉혹한 경쟁과 커지는 빈부 격차가 두드러진 현재의 한국 사회가 ‘남을 도우려는 열정’이 넘치는 공동체로 진화하지 않으면 한국은 성숙하고 조화로우며, 따뜻하고 품격 있는 사회를 이루기 어렵다. 이제 한국은 ‘건설적 낙관주의(constructive optimism)’가 대세를 이루는 사회가 될 자격이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래야 현실에 대한 만족감과 여유가 생기고,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믿으며,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려는 마음이 싹트는 건강한 나라가 될 수 있다.

지구라는 공동체에서 한국의 위치는 어떤가? 경제력 측면에선 한국은 G7에 근접해 있다. 그럼 한국은 국력에 맞는 국가의 품격(국격)을 가지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일정 수준의 국력에 달해야 국격을 논할 수 있는 단계로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대외원조 등 국제사회 공헌도, 민주적 정치체제, 법치, 개방성과 포용성, 국민 품격, 사회 안정성, 지적·문화적 성숙도 등이 국격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대외원조 측면에서 한국은 2006년 원조 공여국들로 구성된 개발협력위원회(DAC)에 가입했다. OECD는 원조 목표치를 국민총소득(GNI)의 0.7%로 정하고 있다. DAC 30개 회원국 중 이 기준을 충족한 국가는 룩셈부르크(1.05%), 노르웨이(1.02%), 덴마크(0.71%), 스웨덴(0.99%) 4개국밖에 없다.

이익만 챙기는 중상주의 이미지 여전

OECD 회원국 중 최대 공여국인 미국의 지난해 원조 규모는 346억 달러이지만 GNI의 0.16%에 그쳤다. 1990년대 세계 최대 공여국이었던 일본은 지난해 155억 달러를 공여해 미국·영국·독일에 이어 4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GNI의 0.29%였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지난해 코로나19로 인한 예산 압박을 명분으로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가 법제화한 GNI의 0.7% 공여 규모를 잠정적으로 0.5%로 축소하는 법안을 의회에서 근소한 차이로 통과시켰다. 이에 대해 존 메이저 전 총리는 “원조 축소는 대영제국(Great Britain)이 아닌 소영국(Little England)의 낙인을 찍는 일”이라고 개탄했다. 영국 시민단체들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약속을 깨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로 인해 영국은 국제사회에서 상당한 이미지 하락을 감내해야 했다.

한국은 어떤가? 한국의 원조 규모는 25억 달러로, GNI의 0.15%에 불과하다. 한국의 원조 규모는 G7 중 원조를 가장 적게 내고 우리와 비슷한 경제 수준인 이탈리아(49억 달러, GNI의 0.24%)의 절반 수준이다.

짧은 기간에 선진 경제로 진입한 역사에 비추어 한국이 오랜 기간 선진국 지위를 누려온 나라들과 원조 규모를 비교하는 것은 불공정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각을 바꾸어 생각하면 반세기 전까지 참담한 빈곤을 경험해 배고픔이 어떤지 잘 아는 한국은 오히려 많은 공여를 해야 할 도덕적 책무를 가지고 있다.

많은 한국 기업이 동남아 등 전 세계에 진출해 큰 이익을 거두고, 해당국의 고용 창출과 기술 이전에 기여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이익만 챙기고 진출국 발전에는 관심이 없는 상인 국가, 중상주의 국가라는 이미지가 불식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이제는 한국도 세계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자각을 가져야 하는 시대이다. 특히 동북아 3국의 일원인 한국은 중국·일본과 여러 면에서 비교될 수밖에 없다. 국가 규모로 볼 때 한국이 군사력이나 경제력에서 중국·일본을 추월하기는 힘들다. 결국 패권 경쟁에 관여하지 않는 평화 지향의 선진 중견국으로서 한국이 중·일 보다 앞서야 할 분야는 빈곤 퇴치, 기후변화, 전염병 등 지구적 과제의 해결에 동참하면서 평화롭고 번영하는 세계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일이다.

세계를 돕는 것도 국가경쟁력 지표

그런데 DAC 멤버가 아닌 중국은 지난해 GNI의 0.36%인 380억 달러를 대외 원조에 할애했다. 원조를 통해 비민주적 권위주의 국가라는 이미지를 상쇄하고 친중국 국가를 증대시키려는 전략으로 평가되지만, 원조 규모만 따지면 미국을 능가하는 세계 최대의 원조 공여국이다.

또 미국 등 선진국들이 자국 내 코로나19 확산 방지에 급급해 백신의 대외 지원을 소홀히 하는 사이, 중국은 시노백·시노팜이란 백신을 발 빠르게 동남아시아·아프리카 등 개발도상국에 대량 지원함으로써 이들 국가와의 관계를 증진하고 국가 이미지도 개선하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한국이 가야 할 방향은 명확하다. 후발 선진국으로서, 또 동북아 국가의 일원으로서 한국은 단계적으로 원조 규모를 적어도 일본의 GNI 비율에 버금가는 0.3% 정도의 수준으로 올리는 목표를 세워야 한다. 정부로서는 국내적으로 많은 예산 지출이 필요한 시대에 원조를 늘리는 데 저항감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공헌력’도 국가의 중요한 경쟁력이다.

신흥 선진국으로서 세계경제 발전 역사에서 특별한 위치에 있는 한국이 어려운 시기일수록 세계와 인류의 대의에 기여함으로써 큰 빛을 발할 좋은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대외적 공헌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한국을 선진국에 못지않게 매력이 넘치는 공간으로 발전시키는 일이다. 세계인이 와보고 싶고 오래 살아보고 싶은 한국이란 브랜드를 만들어야 한다.

나라 규모나 지정학적 이유로 한국은 중국·일본이나 서방 선진국보다 문화적 전통을 축적할 경제적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기라도 하듯 한국은 단기간에 제조업뿐 아니라 영화·음악을 포함한 문화산업에서도 전 세계가 주목하고 경탄하는 중요한 물결(한류)을 만들었다. 한류가 한국 이미지와 상품 가치를 크게 올려놓은 것도 사실이다.

개방적 공동체 일구는 세계시민

이제 한국 사회를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성숙한 공동체로 만드는 노력에 국민이 동참해야 할 시기다. 한국 사회가 세계인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열린 무대가 되지 않으면 한국인도 세계를 무대로 꿈을 펼치기 어렵다. 안타깝지만 외국인의 눈에는 한류의 인기와 한국인에 대한 인식 사이에 괴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이제 지구가 내 조국이며 나는 세계 시민이란 의식을 가져야 할 때다. 그래야 한국인 자체가 한국의 품격을 높이는 값진 브랜드가 될 것이다.

앞으로 한국이 경제 발전을 거듭할수록 한국은 국제 공헌, 개방성과 포용성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국제사회의 엄정한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이 시험을 통과해야 한국은 명실상부한 선진국으로서의 평가와 대접을 받을 수 있다.

나는 경제 발전의 원동력인 활기, 남을 배려하고 돕는 온기, 기품 있는 문화의 향기가 넘치는 한국을 꿈꾼다. 그 꿈이 실현되면 국력과 국격이 상승 작용을 하며 물질·정신 양면에서 풍요로운 진정한 선진 한국이 탄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