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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폐’ 취급하더니, 내로남불 SOC예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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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손해용 기자 중앙일보 경제부장
손해용 경제정책팀장

손해용 경제정책팀장

2018년 8월, 당시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은 국회에서 “우리 정부 들어서는 고용이 많이 느는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이나 부동산 경기 부양이나 이런 정책을 일절 쓰지 않고 그런 유혹을 느껴도 참고 있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는 2017년 출범 때부터 재정 우선순위를 SOC에서 사람으로 바꾼다며 SOC 투자 축소를 예고했는데, 이를 재차 강조한 것이다. 4대강 사업을 밀어붙인 이명박 정부, 부동산으로 경기부양을 시도한 박근혜 정부와 차별화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하지만 다짐은 오래가지 못했다. 25일 배준영 국민의힘 의원이 기획재정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문 정부가 처음으로 예산을 짠 2018년에는 SOC 예산이 19조원으로 전년보다 14%나 줄었지만, 이후 4년 내리 전년보다 예산을 늘렸다. 올해 SOC 예산은 28조원으로 역대 최대. SOC에 가장 적극적이었다는 이명박 정부 때의 SOC 연예산(2010년 25조1000억원)을 2년 연속 뛰어넘었다.

디지털·안전·생활환경 분야에도 투자해 종전 토목 중심 SOC와는 차별화된다는 게 정부 논리다. 하지만 “내로남불이라는 비판을 우려해 기존 SOC를 생활형SOC·디지털SOC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예산을 늘려왔다”(배준영 의원)는 시각이 많다. 실제 올해 투자 상위 50개 사업을 보면 예전처럼 도로·철도·시설 등을 새로 건설하거나, 개선하는 사업이 주를 이룬다. 야당 시절 그렇게 ‘토건 삽질’이라고 비판하던 SOC 사업들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사상 최대 기록한 SOC 예산.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문재인 정부에서 사상 최대 기록한 SOC 예산.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문 정부가 ‘내로남불’이라는 비아냥을 감수하고 전 정부의 행태를 그대로 답습하는 데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경기가 침체하고, 고용이 악화하는 상황에서 내수를 띄우고 일자리를 늘리는 데 SOC만한 특효약이 없기 때문이다. 건설산업연구원에 따르면 건설업은 다른 산업보다 노동소득 분배율과 후방 연쇄효과가 가장 크다. 건설 부문의 취업유발계수(10억원당 13.9명)도 전기 및 전자기기(5.3명), 자동차(8.6명) 등을 웃돈다.

특히 지난해와 올해 SOC 예산을 늘린 것은 대통령 선거를 염두에 둔 ‘매표성’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집권 초기 SOC 사업을 적폐로 규정하고 추진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던 정부가 이제 와서 말을 바꾸니 정치적인 목적이 깔렸다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이다.

이젠 과거 정부의 SOC에 대한 비판 발언을 사과하고, 필요성을 인정해야 한다. 또 정치적인 목적이 아닌, 시급한 사업 위주로 집행해야 재정 부담을 줄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과거 정부를 ‘토건정부’라고 힐난했던 문 정부가 ‘신(新) 토건정부’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