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역지사지(歷知思志)

팔준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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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유성운 기자 중앙일보 기자
유성운 문화팀 기자

유성운 문화팀 기자

조선 태조 이성계는 함북 영흥 출신으로 여진족 세력을 휘하에 두고 많은 전공을 세웠다. 북방 출신답게 전장에서 말을 다루는 솜씨가 매우 뛰어났던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팔준마(八駿馬)라고 하여 각별하게 아꼈던 애마들이 있었다. 말들에 각각 유린청·횡운골·추풍오·발전자·용등자·응상백·사자황·현표라는 이름을 붙여줬는데, 뜻 또한 범상치 않았다. 유린청(遊麟靑)은 기린과 노는 청마, 현표(玄豹)는 검은 표범, 추풍오(追風烏)는 바람을 쫓는 까마귀, 사자황(獅子黃)은 사자와 같은 황색마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역지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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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전노장 이성계와 전장을 누볐으니 말 역시 몸이 성했을 리가 없다. 대부분 화살을 한두 번씩은 맞은 전력이 있다. 이성계에게는 전장의 동지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손자인 세종은 ‘용비어천가’를 지으면서 말들의 부상 전력과 장례 사항까지 기록하는 등 정중하게 예우했다. 또 당대 대화가였던 안견을 시켜 ‘팔준도(八駿圖)’라는 이 8마리 말의 그림을 남기도록 했는데, 현재 원본은 사라지고, 모사한 그림만 남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얼마 전 KBS 사극 ‘태종 이방원’에서 이성계의 낙마를 연출하던 중 과도한 장치 때문에 말이 죽는 상황이 벌어졌다. 비판 여론이 거세자 KBS 측은 사과와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한편 자숙하는 의미로 2주간 결방하겠다고 밝혔다. 이성계는 조선 국왕 중 말에 대한 애정이 가장 각별했는데, 그의 낙마를 실감 나게 연출하기 위해 살아있는 말을 죽게 했다는 사실이 얄궂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