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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토크라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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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한영익 기자 중앙일보 기자
한영익 정치에디터

한영익 정치에디터

비토크라시(vetocracy)는 『역사의 종언』으로 유명한 미국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2013년 한 기고문을 통해 알린 용어다. 민주주의(democracy)에서 대중을 뜻하는 데모(demo) 대신 거부를 뜻하는 비토(veto)를 넣어 만든 말이다. ‘거부민주주의’로 요약된다. 상대 당의 정책과 주장이라면 일단 거부하고 보는 극단적 파당 정치를 뜻한다.

“비토크라시가 미국 정치를 지배하고 있다”는 후쿠야마의 메시지는 2013년 당시 공화당을 겨냥했다. 오바마 케어를 둘러싼 대립이 가장 극심했다. 우여곡절 끝에 법은 통과됐지만, 후임 트럼프 행정부가 오바마 케어 무력화에 나서는 등 정치적 후유증이 만만치 않았다.

한국 정치에서도 비토크라시는 ‘야당의 발목잡기’를 비유할 때 종종 언급된다. 2020년 11월 공수처장 후보 추천위 구성을 두고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이 태클을 걸자 더불어민주당에서는 “4개월 넘게 설득했는데 비토크라시만 보였다”(김태년 당시 원내대표)고 경고했다. 민주당은 결국 야당의 공수처장 추천 비토권을 무력화하는 법안을 단독으로 처리했다. 공수처의 정치적 중립성을 담보하겠다며 만든 야당 비토권이 힘으로 무력화되면서, 양당의 불신은 더 깊어졌다.

문제는 당장 40여 일 앞으로 다가온 대선 역시 “저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네거티브 서사가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 말 지지율이 40%에 달하지만, 동시에 정권교체론 역시 절반을 넘어서는 ‘모 아니면 도’ 여론이 반영된 풍경이다. 시민들을 향해 ‘비토 후보’가 누군지 묻는 여론조사 업체도 나타났다. 집권당도 야당도 비토크라시의 유혹을 떨치기 어려운 구조다.

극심한 여론 양극화에 풍조에 누구보다 책임을 느껴야 할 당사자는 지난 5년간 국정을 이끌어온 청와대다. 하지만 문 대통령 주변에선 높은 임기 말 지지율에 대해 “선거 국면에서 시대에 맞는 리더십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탁현민 의전비서관)이란 자화자찬이 나올 뿐, 반성 메시지는 찾아보기 어렵다. 새해 종교 지도자들을 만난 문 대통령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에서 남은 마지막 과제가 국민 사이의 지나친 적대와 분열을 치유하고, 통합과 화합의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한 말도, 그래서 공허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