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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예영준의 시시각각

김정은에겐 시간표가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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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대미 신뢰구축 조치를 전면 재고하고 '잠정 중지했던 모든 활동'을 재가동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핵실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 중지라는 '모라토리엄' 선언의 철회를 시사한 것으로 보인다. [뉴스 1]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대미 신뢰구축 조치를 전면 재고하고 '잠정 중지했던 모든 활동'을 재가동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핵실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 중지라는 '모라토리엄' 선언의 철회를 시사한 것으로 보인다. [뉴스 1]

북한이 새해 벽두부터 네 차례 연속으로 탄도미사일을 쏘아올리더니 급기야는 핵실험·대륙간탄도탄(ICBM) 재개 카드를 꺼내들었다. 2019년 2월 하노이 협상 결렬 이후의 정중동(靜中動)에 종지부를 찍고 본격 공세로 전환할 것이란 예고로 들린다. 북한의 페이스에 따라 한반도 긴장 수위가 출렁거리는 상황이 재연될 가능성이 커졌다.
 대북 문제에 관한 한 문재인 정부의 태도에는 놀라울 정도의 일관성이 있다. 이번에도 예외없이 “미국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이라거나 “협상 재개에 대비해 몸값을 높이려는 협상 전략”이란 분석이 고위 당국자나 여권 지도부의 입을 빌려 나왔다. 친정권 성향의 전문가들의 분석도 대동소이하다. 북한이 미사일을 쏘아대니 종전선언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졌다는 부화뇌동식 발언도 고위 관료의 입에서 공공연히 나온다.
 이런 분석은 북핵 문제의 역사만큼이나 뿌리가 깊다. 정부 관료나 북한 전문가들에 따르면 북한의 도발은 “대화를 하자”는 북한 특유의 화법이다. 실제로 지난 20∼30년간 북한의 행동 패턴을 보면 그런 해석도 가능해 보인다. 평창·싱가포르의 전주곡이었던 2017년의 강경 대치 국면도 그랬고, 2006년 1차 핵실험을 강행하고는 곧바로 대화로 돌아서 9·19 공동성명에 이르렀던 경험도 마찬가지였다. 도발 강행→벼랑 끝 전술→대화 국면 전환→협상(겸 시간벌기)→합의 파기→도발 재개의 사이클은 경험을 통해 터득한 북한의 행동 패턴이다. 어느 특정한 시점만 놓고 북한의 속셈을 읽거나 단기적인 행동 예측을 하는 데 있어서는 유용한 분석법일 수도 있다.
 그러나 더 긴 시간틀을 놓고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가장 치명적인 사실은, 이런 사이클을 몇 차례 돌리는 사이 북한이 사실상의 핵보유국이 됐다는 점이다. 북한은 공세 국면이든, 대화 국면이든 단 한 번도 핵보유국이란 목표를 포기한 적이 없다. 협상장에서 합의문에 서명하는 순간에도 북한 어딘가의 비밀 시설에서는 핵 개발을 멈추지 않았다. 북한의 행동이 우리에게는 막가파식 벼랑 끝 전술로 보이지만, 북한은 자신들의 중장기 전략이 있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그 시간표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시간표가 없다면 김정은 집권 10년 동안 네 차례의 핵실험과 120여 차례 미사일 발사는 설명할 길이 없다. 화려했던 2018년의 대화 국면도 북한의 편에서 해석하자면 2017년 핵 무력 완성이란 전략적 고지에 성공적으로 올라선 뒤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평화공세로 돌아선 것이란 해석이 가능하다.
 북한의 중장기 전략을 읽지 못하면 대북 협상에서 판판이 당하기 마련이다. 지난 30년간 우리의 인식이 얼마나 안이했는지 증거를 대는 건 어렵지 않다. 한국의 역대 지도자의 발언은 “북한은 핵을 만들 능력도, 의지도 없다”에서 “북한 핵 개발은 자위용”으로, 다시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는 확고하다”는 식으로 바뀌어갔다. 과연 북한의 목표와 의지가 그때그때 바뀌었고, 비핵화 의지란 게 갑자기 생겼다가, 사라졌다가 한 것일까. 2017년 ICBM용 엔진시험에 성공한 뒤 김정은이 최고 존엄의 체통을 내려놓고 군복 차림의 기술자를 등에 업고 덩실덩실 춤추는 장면이 공개된 적이 있다. 그 사진 속 김정은의 표정이 숨길 수 없는 일관된 진심일 것이다.
 이제 북한에 남은 것은 핵보유를 암묵적으로 인정받아 동북아의 이스라엘 혹은 동북아의 파키스탄이 되는 것이다. 지난 19일의 노동당 정치국 결정은 이 목표를 향한 최후의 공세를 시작해 보겠다는 전략적 결의일 수 있다. 여전히 유동적이긴 하지만 엄포용이라고 단정해서는 일을 그르치게 된다.
 이제 북한은 더 이상 벼랑 끝에 설 필요가 없어졌다. 절대적으로 형세가 불리하던 옛날의 북한이 아니기 때문이다. 북한이 뭘 하든 “식량 사정이 급해서 하는 소리” “때가 되면 다시 대화로 돌아오게 돼 있다”는 식의 안이한 인식만큼은 버려야 한다.

예영준 논설위원

예영준 논설위원

북한의 중장기 전략 보지 못하고 #도발을 대화재개 신호로 읽는 오류 #반복된 안이함이 북핵 문제 키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