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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인한의 퍼스펙티브

사회적 신뢰 없이는 코로나 재난 극복 어렵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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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대감염 시대, 탈출구 없나

송인한의 퍼스펙티브

송인한의 퍼스펙티브

재난 시기 심리적 변화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①재난이 몰려오기 전부터 경고와 위험의 신호를 감지하며 불안감을 점차 느끼다가 ②재난이 발생하면서 충격과 혼란·공포를 경험하나 ③재난 직후에는 이타주의적이고 영웅적인 행동이 나타나고 집단 응집력이 강해진다. ④그러면서 사회 구성원 서로를 돕고 지지하며 강한 사회적 결속력을 경험하고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 희망을 가지게 된다. ⑤그러나 시간이 점차 흐르며 에너지가 소진되고 인내력이 떨어지며 현실의 고충에 직면하게 되고, 그간 유지했던 희망이 무너지고 기대에 실망하며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태도와 함께 분노와 우울을 느낀다. 사회적 분배가 자신에게 불공정하다고 느끼면서 불만이 커지고, 사회적 결속이 느슨해지며 각자도생의 이기적인 생존의 길로 접어든다. 가짜뉴스에 영향받으며 혼란과 갈등을 느끼기도 한다. ⑥그리고 마침내 긴 회복의 시간 동안 때론 감정의 기복을 경험하면서 사회를 새로 구성해 나간다.

그 상태는 재난 이전과는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다른 상태가 됨은 물론이다. 잔흔이 남기도 하지만 때론 재난을 극복하며 더욱 성장한 상태가 될 수도 있는 변화다. 이러한 과정은 미국 약물남용·정신보건서비스국(SAMHSA)에서 소개하는 ‘재난의 단계’로 잘 알려져 있다.

재난 자체보다 사회적 대응에 따라 피해 규모 달라져
일본 고베 대지진, 인도 종교갈등에서 빛난 주민 협동
대선 국면에서 정치가 오히려 사회적 연대 고갈시켜
위기의 시간 함께 이겨내는 ‘깐부정신’ 더욱 중요해져

혼돈·적응이 혼재하는 현재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지금까지 어떤 단계를 경험했으며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이미 이전에 환경 파괴에 따른 기후 위기, 세계화로 인한 급속한 확산 가능성 등의 맥락에서 신종플루·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등의 전염병을 반복 경험했기에, 언젠가 닥쳐올 재난의 징후를 막연하게나마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19가 끼친 충격이 이리도 강력하리라 예상했던 이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순식간에 전 세계를 덮친 팬데믹의 충격을 경험한 직후에는 의료진의 헌신적인 희생과 대한민국 특유의 역동적인 정책을 통해 성공적으로 간주하던 방역시스템에 알파벳 케이(K)를 붙이며 자부심에 감동하던 영웅적 대한민국의 시간이 있었다. 아울러 서로 지지하며 협력하는 공동체 의식이 가득하던 허니문 기간이 있었음도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은 혼돈과 적응이 혼재하는 현실의 시간이 아닐까. 사회 전체를 위해 고통을 감내했던 개개인의 희생은 이제 한계에 부딪혔고, 억눌리고 제한받는 자유에 지쳐가고 있다. 때론 SNS에 넘쳐나는 비과학적 가짜뉴스와 음모론에 생각이 흔들리고, 팬데믹 이전의 자유를 갈망하며 울분을 느끼는 사람도 많다. 동시에 재난으로부터 극복하고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긴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는 중이다.

문제는 미래가 낙관적인 회복으로 확정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저절로 주어지는 회복은 없다. 희생을 최소화하며 성공적으로 극복할지, 아니면 공동체 붕괴의 파국으로 이어질지, 우리는 갈림길에 서 있다.

한국의 사회적 신뢰도 OECD 최하위권

과거 재난 극복 사례를 돌아보면 어떤 요소가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지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버드대 보건대학원의 이치로 가와치와 리사 버크먼은 재난을 경험한 두 도시의 사례를 분석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재난의 물리적 파급력 자체보다 사회가 어떻게 대응했느냐에 따라 피해 규모가 달랐다. 지진을 예로 들면 리히터 규모로 측정된 지진의 세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대응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희생의 규모가 달랐다.

두 연구자는 지진 피해가 있었던 일본 고베(자연재난)와, 힌두교와 이슬람교 간의 종교적 갈등이 도시를 파괴하는 인도(사회재난)의 분석을 통해, 두 사례에서 공통으로 존재하는 긍정적 요인을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사회적 자본인 사회적 신뢰였다.

고베 대지진이라는 같은 물리적 재난을 경험했더라도, 그 이전부터 오랫동안 지역 주민들 간에 협력 활동을 하고 유대감을 가져온 지역에서는 자발적 구조 활동이 이뤄지고 함께 불을 끄며 공동의 주거지를 복구하고 서로 소식을 공유하며 빠른 회복이 진행됐다. 그런 사회적 신뢰의 결합이 없는 인근 지역 사람들은 재난으로 무너져가는 마을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던 것과 달리 말이다.

종교 갈등의 사회재난을 경험한 인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가 자주 접촉하며 함께 참여하는 지역사회 활동, 예를 들면 종교 차이를 넘어 독서클럽이나 다른 단체 활동이 활성화된 지역에서는, 종교를 비방하는 가짜뉴스나 폭력을 조장하는 선동에 흔들리지 않고 평화를 지켜낼 수 있었다.

두 사례에서 모두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이 사람과 사회를 보호했다.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되지만, 그 뻔한 것이 지켜지지 않는 우리의 현실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냉철하게 바라볼 때 안타깝게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9개 회원국 중 우리나라의 사회적 신뢰도는 최하위에서 2번째 수준이다.

함께 살아가는 기술 훈련해야

가장 많이 언급되는 해법은 접촉과 소통이다. 세대와 지역·계층이 다른 사람들을 계속해서 만나 대화하면서 익숙해지고 서로에 대한 이해가 높아진다. 접촉가설에 따르면 낯선 이와의 접촉을 통해 타인과 타 문화에 대한 지식이 높아지며 편견이 줄어들고 불안감이 감소하며 신뢰의 관계가 쌓이게 된다.

두 번째는 공동체 신뢰를 깨뜨리는 행위에 대한 엄격한 법 집행이다. 특히 기득권에 대한 엄정하고 강력한 법 집행이 사회적 신뢰를 높인다. 세 번째는 객관적 데이터 구축이다. 정치적 입장과 상관없이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과학적인 근거 위에서 건강한 논쟁이 가능하다. 같은 근거를 보며 다르게 해석하고 논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편향된 소위 지식인과 전문가들이 만들어내는 왜곡된 데이터로는 사회적 신뢰 구축이 불가능하다.

마지막으로 함께 살아가는 기술을 훈련해야 한다. 신뢰는 막연한 믿음으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공동 방향을 합의하고 합리적 규칙을 함께 만들어 준수하고, 신뢰를 지키며 살아갈 때 보상을 받는 경험을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연습해야 한다. 타인과 공감할 수 있고 차이에 대해 건강하게 논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사회적 신뢰가 가능하다.

이념·정파 떠난 공통분모 공유해야

우리는 지금 재난의 회복 단계 중 가장 길고 어려운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 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해 사회적 신뢰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지난 9일 한국인 최초로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을 받은 오영수 배우의 ‘오징어 게임’에 나오는 ‘깐부’ 대사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위기의 시대에 필요한 공동체 정신의 갈급함 때문이 아닐까. “니꺼 내꺼가 없는” 공동체의 마음으로 위기의 시간을 함께 극복하는 동반자로서 ‘깐부’가 절실하다.

그러나 현재 대선 국면 속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럽다. 이념과 정책 방향의 건전한 갈등이 아니라, 반목과 분열의 갈등을 증폭되고 있다. 정치가 오히려 사회적 신뢰를 고갈시키고 있다.

사회공동체를 위한 최소한의 공통분모를 후보들이 공유하고 있는지 우려된다. 코로나19 재난으로부터 사회를 회복시키고 기후 위기에 대처하며 불평등과 차별·소외를 해소하고 함께 행복과 번영을 누릴 수 있도록 미래 세대를 위한 지속가능한 세상을 만드는 데는 이념과 정파를 떠나 같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고, 지극히 상식적인 합의라도 후보들이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