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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알 만한 분들’의 침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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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조민근 기자 중앙일보 경제산업디렉터
조민근 정책디렉터

조민근 정책디렉터

“곤란한 질문이다.”

지난 18일 기자간담회에 나선 강도태 신임 국민건강보험공단(건보공단) 이사장은 말을 아꼈다. ‘탈모약 건보 적용’ 등 대통령선거 후보자들이 내놓은 공약에 대한 질문을 받고서였다. 미리 취합한 사전 질문에도 관련 내용이 있었지만 정작 공단이 배포한 답변서에는 빠져 있었다. 현장에서 다시 질문이 나왔고 강 이사장은 “후보들의 공약에 대해 언급하는 건 적절치 않다”며 즉답을 피했다.

건보 재정 악화 속 대선 공약 경쟁
관료 출신 이사장은 “언급 부적절”
포퓰리즘 제동장치도, 결기도 없어
“재정 파탄 시작점” 현실될까 우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쏘아 올린 탈모약 공약을 신호탄으로 최근 여야는 경쟁하듯 건보 공약을 쏟아내고 있다. 탄력을 받은 이 후보는 임플란트에도 건강보험 적용을 확대하겠다고 했다. 이에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당뇨 혈당측정기 비용 지원을,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정신과 치료비 지원을 각각 들고 나섰다. 하지만 이들 항목에 건보를 적용하는 게 우선순위에 맞는 것인지, 비용은 얼마나 치러야 하는지를 놓고 논란도 커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문재인 정부 들어 건강보험 재정은 2018년 1778억원의 손실을 기록한 뒤 2019년 2조8243억원, 2020년 3531억원 등 3년 내리 적자를 냈다. 문 정부 출범 전 20조원에 달하던 누적 흑자도 2024년쯤 고갈될 수 있다는 게 국회 예산정책처의 전망이다. 보장 수준을 그대로 유지해도 급격한 고령화 추세를 고려하면 건보 재정의 지속가능성에 물음표가 달릴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이런 상황에서 표를 노린 공약이 “건보 재정 파탄의 시작점이 될 것”(이상이 제주대 교수)이란 경고도 잇따른다.

지난 18일 기자간담회에 나선 강도태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 [사진 국민건강보험공단]

지난 18일 기자간담회에 나선 강도태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 [사진 국민건강보험공단]

보건복지부 건강보험정책국장, 차관을 거쳐 건보를 책임지는 자리에 오른 신임 이사장의 입에 관심이 쏠린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가 내놓은 답변은 “건강보험 운영은 여러 절차와 검토해야 할 기준이 있고, 사회적 요구도 종합적으로 반영해야 한다”는 정도였다. 말미에는 “사이다 답변을 못 해 미안하다”라고도 했다.

애초에 질문을 한 기자들도 ‘이건 되고, 저건 안된다’식의 ‘사이다’를 기대한 것은 아닐 것이다. 구체적인 건보 적용 여부는 그의 권한 밖의 일인 데다, 선거 개입 논란을 부를 수 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지만 있다면 표를 겨냥한 공약 경쟁에 경각심을 줄 수 있는 방법은 많다. 건보 재정의 상황, 원칙과 우선순위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아마 충분했을 것이다. 여기에 혜택이 늘어나면 그만큼 보험 가입자들의 부담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자명한 이치를 덧붙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 과거에는 대선 과정에서 돌출된 득표용 공약을 걸러내는 데 관료 집단이 톡톡히 역할을 했다. 각 부처와 공공기관이 논란이 큰 유력 주자들의 대선 공약의 비용과 효과를 사전에 분석하기도 했다. 정권 인수위원회에 참가한 이들은 이를 바탕으로 무리한 부분을 조정하거나 완화해 충격을 줄였다.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되는 게 오히려 다행스러운 경우들이었다.

한 발 더 나가 사전 견제에 나서기도 했다. 총선과 대선이 나란히 치러진 2012년 기획재정부는 이른바 ‘복지 태스크포스(TF)’를 만들어 정치권 공약의 재정부담을 분석하고 결과를 공개했다. 정치권의 반발, 이어진 선관위의 제동에 TF는 중도에 해산됐다. 다만 여야 구분 없이 지원만 내세우고 비용을 축소하는 상황에서 국민에 균형 있는 정보를 제공한다는 TF의 취지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결기는 급속히 사그라졌고, 문 정부 들어선 아예 실종됐다. 이념인지 정책인지 모를 무리한 공약도 걸러지기는커녕 오히려 증폭됐다. 탈(脫)원전, 최저임금 인상, 규제 일변도의 부동산정책이 대표적이다. 부작용이 눈에 뻔히 보였지만 정부 내 ‘알만한 이들’은 입을 닫았고, 거수기로 전락한 각종 위원회와 공공기관 이사회 역시 제동을 걸지 못했다. 조용히 시키는 대로 하면 고위직과 공기업까지 섭렵하는 ‘천수’를 누리고, 자칫 입바른 소리라도 했다간 한순간 좌천된다는 ‘학습효과’도 어느덧 관료사회에 각인됐다.

차라리 소신을 갖고 추진했다면 그나마 봐줄 만했을 것이다. 탈원전을 뒷받침한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정권 말에 이르러서야 한국 원자력발전의 안전성과 경쟁력을 강조하는 보고서가 나오고, 한국수력원자력이 탈원전 논리를 부인하는 보고서를 국회에 제출하는 장면에선 실소가 터져 나온다. “영혼 없는 공무원”이라는 언론의 비판에 그나마 자존심 센 관료들이 발끈하며 항변하던 풍경도 이젠 옛일이 된 것 같아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