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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리처드 3세’로 무대에 선 황정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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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연극학도일 때 선배님들이 많은 고전 작품을 올리는 것을 보며 동경했습니다. 고전의 힘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시간이 지나면서 클래식의 위대함이 없어졌지요. 그래서 너무 안타까웠어요.”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로 몇 년 만에 연극 무대에 선 배우 황정민의 말이다. ‘고전의 위대함’을 관객에게 보여 드리고 싶었단다. 일일이 열거하는 것이 무의미할 만큼 수많은 영화를 통해 대중적 인지도와 인기의 정점에 선 그가 몇 년 만에 다시 연극 무대에 선다는 소식이 반가울 따름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를 무대에서 볼 수 있다는 반가움보다는 그가 다시 무대에 서는 이유가 고맙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고전의 위대함’과  ‘그 위대함이 없어졌음에 대한 안타까움’이라는 두 마디는 연극 무대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니까.

‘고전’의 사전적 정의는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히고 모범이 될 만한 문학이나 예술 작품’이다. ‘옛(古) 문헌(典)’이라는 필요조건을 넘어 ‘가치’라는 충분조건까지 갖춘 것을 우리는 고전이라 한다. 그러니까 고전은 절대로 ‘낡은 것’이 아니라 ‘옛것이되 오늘의 것’으로서, 더 나아가 미래에도 충분히 기능할 수 있는 것의 총칭이다.

“고전의 힘 알고 있다”는 스타배우
정신적·문화적 보고로서의 고전
우리 시대는 어떤 고전을 남길까

그런데 고전이라 일컫는 거의 모든 것은 분야를 막론하고 대체로 진지하고 심각하다. 희극조차도 그냥 우습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반추해야 할 것들로 가득하니 읽고 또 읽어도 어렵다. 보고 또 보아도, 듣고 또 들어도 따분하고 지루한 것이 고전이다. 전문가의 설명을 접하면 대충 알 것도 같지만, 그만큼 시간을 투자할 여유는 없다.

그래서 며칠에 걸쳐 두꺼운 책을 읽고 사색하기보다는 자투리 시간에 웹툰을 보고, 한 시간 내외의 교향곡을 집중해 듣기보다는 3분 내외의 가요를 듣는다. 극단적인 예로, 자기소개서에 쓴 감명 깊었던 책에 대하여 심층 질문을 던지자 머뭇거리던 끝에 결국 이렇게 실토한 수험생도 있었다. “사실은 요약본을 읽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탓하자는 게 아니다.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도서관을 찾고 때로 원서 한 권을 구하기까지 몇 달을 기다려야 했던 시절과 1~2초 이내에 필요한 모든 정보와 원하는 콘텐트를  눈앞에 펼칠 수 있는 오늘날의 지적·문화적 향유 양태가 같다면 오히려 더 이상한 일 아닌가. 그렇게 이해하고 넘어가려 애써보지만, 그래도 남는 의구심 하나. 지금 우리가 만들고 누리는 문화적 소산이 현재에 소비되는 것을 넘어 미래의 고전으로 과연 얼마나 남을 수 있을까.

1913년 5월 29일,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큰 소동이 있었다. 러시아 발레단의 ‘봄의 제전’ 공연 중 일부 관중이 참다못해 고성과 야유를 퍼부었다. 박절적 규칙성을 회피(arhythmic)한 서주, 예측 불가능한(하지만 거시적 측면의 질서를 구축한) 악센트, 포효하는 듯한 불협화 등 당대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이 도발적 작품의 작곡가는 다름 아닌 스트라빈스키(1882~1971). 이 충격적인 음악을 작곡한 지 불과 7년 후, 스트라빈스키는 돌연 신고전주의 사조에 동참한다. 신고전주의의 슬로건은 이렇다. ‘바흐로 돌아가자.’ 당대의 가장 혁신적인 작곡가가 난데없이 200여 년 전의 정신으로 회귀한 이유가 무엇일까.

일본인들이 ‘음악의 아버지’라 일컬을 만큼 서양음악에서 바흐의 음악은 정신적·기법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베토벤은 이렇게 말했다. “시냇물(=Bach)이라니. 그는 바다라 불려야 마땅하다.” 브람스는 “바흐를 공부하라. 그 안에서 모든 것을 찾을 것이다”라고 했고, 구노는 “바흐 이후의 모든 음악을 잃어버린다 해도 바흐의 음악을 토대로 그것을 재건할 수 있다”라고까지 했다.

그렇다. 그것이 바로 고전의 힘이고 고전의 위대함이다. 고전은 시냇물이 아니라 바다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을 찾을 수 있고, 모든 것을 잃어도 그것을 토대로 재건할 수 있는 정신적·문화적 보고(寶庫)다.

고칼로리 식품을 건강의 적으로 여겨야 할 만큼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마음만 먹으면 어떠한 문화적 콘텐트든 불과 몇 분 만에 눈앞에 펼쳐 볼 수 있는 편리한 세상이 도래했지만, 묵직한 고전은 더더욱 외면받고 가벼운 놀잇거리는 나날이 주목받는다. 그것이 뭐 어떻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러한 삶을 진정 풍요로운 삶이라 할 수 있을까. 우리의 시대는 어떤 정신적·문화적 소산을 남길까. 놀잇감뿐만 아니라 고전으로 자리매김할 만한 그 무엇이 싹을 틔우고 자라날 토양을 마련하는 것 또한 후대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 해야 할 일 중 하나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