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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낙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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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경희 기자 중앙일보 P디렉터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조선 태종은 사냥 덕후였다. 즉위 첫해 “문하부낭사에서 태종에게 사냥을 자제하라 건의”(태종실록 권1, 태종 1년 3월 18일 기사)할 정도였다. 노루를 사냥하다 낙마한 기록도 있다. “말에서 떨어졌으나 상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관(史官)이 알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태종실록 권7, 태종 4년 2월 8일 기사)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 제작진이 낙마 장면을 찍으려 말의 다리에 묶은 줄을 당겨 고의로 쓰러뜨렸다는 폭로가 나왔다. ‘동물권행동 카라’가 공개한 현장 영상은 충격적이다. 붕 떠올라 고개를 땅으로 처박으며 고꾸라진 말은 1주일 뒤 죽었다. 스턴트맨도 낙마 직후 정신을 잃을 정도로 충격이 컸다고 한다.

매년 할리우드 영화와 드라마 2000여 편의 엔딩 크레딧엔 ‘No Animals Were Harmed(어떤 동물도 다치지 않았음)’ 문구가 붙는다. 동물보호단체인 미국인도주의협회가 촬영 과정에서 동물 학대가 없었음을 인증한다는 의미다. 영화 ‘제시 제임스’(1939년) 촬영 도중 말이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 등의 사건을 계기로 모니터링이 시작됐다. 할리우드에서도 말의 다리를 묶어 쓰러뜨리는 기법이 사용돼 수많은 말이 죽거나 다쳤지만 1939년 이후엔 금지됐다.

카라는 임순례 영화감독이 대표로 있던 지난 2020년 ‘동물 출연 미디어 가이드라인’을 제작해 배포했다. “말의 걸음걸이에 이상을 주는 장치나 약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당시 카라는 촬영 관련 종사자 157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 결과도 발표했다. 새가 멀리 날아가지 못하도록 다리를 부러뜨리거나, 거북이 등껍질을 벗기고, 소에게 일부러 상처를 내고, 동물을 통제하기 위해 전기충격기를 쓰거나, 수의사 없이 스태프가 직접 마취 주사를 놓았다는 등의 증언도 모였다. 시간과 돈이 더 드는 컴퓨터 그래픽 등의 대안을 찾기보다 동물을 죽음으로 내모는 길을 선택한 현장이 그만큼 많았다는 의미겠다.

한국의 촬영 현장에선 동물의 안전이 위험하다는 응답이 61%, 동물 촬영 시 인간의 안전이 위험하다는 답변도 35%에 달했다. 동물의 안위가 보장되는 현장에선 사람도 덜 다치게 마련이다. 태종처럼 낙마해도 상하지는 않도록, 모든 촬영현장이 안전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