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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년기인가 봐" 조롱받는 여성들…매년 179조가 날아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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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김기찬
김기찬 기자 중앙일보 고용노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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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A씨(48·여)는 직장을 그만둘까 생각 중이다. 회사에서 나름 탄탄하게 자리도 잡았지만 최근 들어 힘에 부쳐서다. 회사가 불이익을 주거나 동료와 사이가 나쁜 건 아니다. 한데 A씨가 사직을 저울질하게 된 건 요즘 들어 잠을 제대로 못 이루는 등 갑자기 찾아온 급격한 신체 변화 때문이다. 스트레스도 심해지고, 밤마다 가슴이 뛰고, 열도 난다. 수시로 홍조를 띠고 입술도 부르튼다.

B씨(52·여)도 비슷한 증상 때문에 고민이다. 어지럼증에 툭하면 뇌 안개(Brain Fog,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멍한 느낌)에 시달린다. 가슴이 쿵쿵거려 심호흡을 크게 해봤지만, 효과가 없다. 불안하고, 식욕마저 떨어져 덩달아 체력이 달린다. 가끔 오한이 들고, 잠을 못 이루고 얼핏 잠이 들었다 싶으면 금세 깨기 십상이다. 출근을 못 할 정도로 심각할 때도 있다. 병원을 찾은 B씨는 “더는 직장생활이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경단녀 지원책, 출산·육아에 집중
폐경엔 무심, 여성 정년퇴직 3.3%뿐

“폐경 퇴사 생산성 손실 연 179조원”
영국 노·사·정, 10년 전부터 대책
ILO도 “폐경기 여성인력 관리 필수”

여성들, 급격한 신체변화에 퇴사 고민

인(人)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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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에게 닥친 불청객은 다름 아닌 갱년기다. 폐경기로 불리기도 한다. 지금까지 폐경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문제였다. 여성과 그 가족의 의학적 또는 개인적인 문제로 간주해 왔다. 여성 스스로 의욕이 떨어지는 건 둘째 치고, 신경질적 반응이라도 보이면 “갱년기인가 봐”라며 조롱거리로 삼기 일쑤다. 어쩔 수 없이 닥친 생리·신체적 변화에 괴로워하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2차 가해와 진배없다.

여성이 직장을 잡은 뒤 맞는 첫 번째 고개는 출산이다. 동시에 육아라는 두 번째 고개가 한 묶음으로 다가온다. 이 시기에 많은 여성 근로자가 일자리를 떠난다. 경력단절이다. 여성의 경력단절과 관련된 연구나 정부의 지원은 출산과 육아에 집중돼 있다.

반면 여성 근로자에게 세 번째 고개 격인 갱년기에 대해선 무관심하다. 갱년기 탓에 직장을 떠나는 여성이 얼마나 되는지 통계조차 없다. 정부는 물론 학계, 경영계, 노동계도 갱년기로 인한 노동손실이나 이를 방지할 대책 등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 그저 개인적 문제로 치부한다. 여성 임원이 아예 없거나 그 비율이 턱없이 낮은 이유, 정년퇴직하는 여성이 3.3%에 불과한 까닭을 짐작케한다.

최근 선진국에선 갱년기 여성 근로자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일고 있다. 영국이 대표적이다.

조안나 브루위스(Joanna Brewis) 영국 오픈대학 경영대학원 교수는 “영국에서는 90만명 넘는 여성이 폐경으로 조기에 직장을 떠난다. 갱년기가 닥치면 그들의 재능과 기술·경험이 회사 전체 생산성으로 연쇄 반응을 일으키고, 이로 인한 생산성 손실이 전 세계적으로 연간 1500억 달러(179조400억원) 이상”이라고 말했다. 잘만 치료 또는 관리해서 재능과 경험을 계속 발휘하도록 하면 생기지 않을 손실이다.

영국 76개 기업 ‘갱년기 친화기업 인증’

영국노총(TUC) 웨일스본부 갱년기 여성 보호 캠페인 포스터. [사진 웨일스 TUC]

영국노총(TUC) 웨일스본부 갱년기 여성 보호 캠페인 포스터. [사진 웨일스 TUC]

영국 정부 평등청(Government Equalities Office)은 2010년대 들어 갱년기 여성 근로자를 정부 차원에서 지원하고 나섰다. 사용자에게도 갱년기를 맞은 여성 근로자에게 적절한 치료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휴가를 주도록 권한다. 심지어 정부평등청은 갱년기 여성을 대하는 경영진의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시하기도 했다.

나쁜(Bad) 고용주 : “당신의 성과가 안 좋다. 갱년기면 집에 가야 한다. 근무시간을 줄이고, 급여도 줄이고, 승진은 어려울 것이다.”

착한(Good) 고용주 : “갱년기 클리닉으로 극복할 수 있다. 몸이 좋아지면 돌아올 수 있고, 승진을 위해 나아갈 수 있다.”

정부평등청이 레스터대학에 연구용역을 한 결과 갱년기 여성이 치료를 위해 결근할 경우 1인당 연간 647달러(77만2300원)를 부담했다. 갱년기 증상이 없는 여성이 결근할 경우 투입되는 비용(599달러, 71만5200원)과 큰 차이가 없다. 더욱이 갱년기 여성을 방치했을 경우 발생하는 생산성 손실을 고려하면 여성의 직장 복귀 뒤를 감안한 기회비용으로 삼을만하다. 정부, 학계, 경영계, 노동계가 손을 잡고 ‘갱년기 친화 기업 인증’도 만들었다. 화이자, AXA, 무디스, HSBC 영국, 디스커버리, 후지쓰 등 76개 기업이 인증을 받았다.

영국노총(TUC)은 2013년 갱년기 여성을 위한 가이드를 발간했다. TUC는 이 가이드에서 “폐경 연령 여성에게 특별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점을 우리는 더디게 인식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노조와 고용주가 해야 할 일, 직장 단위의 지원책, 직장에서 적용되고 있는 실제 사례, 갱년기를 진단할 수 있는 리스트, 직장 내 갱년기 여성의 실태 조사 방법 등을 담고 있다. 웨일스 TUC는 폐경 온라인 교육 코스를 만들어 노조 관계자와 여성 근로자에게 제공한다.

국제노동기구(ILO)도 지난해 말부터 캠페인을 시작했다. ILO는 “인구 고령화에 따라 여성의 경제활동은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반면 폐경기 여성으로 인한 손실에는 둔감하다. 앞으로 이에 대한 관리가 갈수록 중요해질 것이고 필수적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세계보건기구(WHO)와 국제폐경학회가 세계 폐경의 날(10월 8일)을 지정한 지 19년이 흘렀다. 한국에선 폐경의 날이 있는지도 모른다. 갱년기 여성 근로자에게 배려는 고사하고, 얼마나 2차 가해를 가했는지 돌아본 적도 없다. 인격권 침해일진데, 온전히 개인이 감당할 일로 여겼다. 사회적 집단 인식의 마비다. 그들의 숨죽인 울음에 귀 기울일 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