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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환자도 아닌데…인공호흡기 꼽은 취객의 충격적 증언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조용수의 코드클리어(89) 

나는 술 취한 사람을 혼수상태로 오인해 기관삽관을 한 적 있다. 환자는 기계음 가득한 중환자실에서 눈을 떴다. 굵은 튜브가 입을 막고 있어 신음조차 낼 수 없는 상태로. 10여 년쯤 지난 이야기다.

의식불명 환자가 응급실에 실려 왔다. 길거리에서 쓰러진 채 발견된 남자였다. 의식상태는 혼수(COMA). 나는 지체 없이 응급처치에 들어갔다. ABC 중에서 제일 먼저 할 일은 기도(Airway) 확보였다. 입을 통해 굵은 관을 목구멍에 밀어 넣고 그 끝에 인공호흡기를 연결했다. 숨구멍을 열었으니 일단 급한 불은 껐고. 다음 수순은 혼수의 원인을 찾아 치료하는 것인데. 문제가 있었다. 원인이 도통 짐작 가지 않았던 것. 젊은 사람이 왜 쓰러졌지? 사고가 있었을까? 모르겠다. 쓰러진 순간을 목격한 사람이 없다. 지병이 있었을까? 아니. 평소에 건강했다고 한다. CT, MRI, 뇌파 등을 검사해봤지만 어떤 이상도 발견되지 않았다.

의식불명 환자가 응급실에 실려 왔다. 길거리에서 쓰러진 채 발견된 남자였다. 의식상태는 혼수. 그런데 CT, MRI, 뇌파 등을 검사해봤지만 어떤 이상도 발견되지 않았다. [사진 Ian Scargill on Unsplash]

의식불명 환자가 응급실에 실려 왔다. 길거리에서 쓰러진 채 발견된 남자였다. 의식상태는 혼수. 그런데 CT, MRI, 뇌파 등을 검사해봤지만 어떤 이상도 발견되지 않았다. [사진 Ian Scargill on Unsplash]

만 하루가 지나고, 환자는 정신을 되찾았다. 목구멍에 튜브가 꽂힌 채로. 기계음 가득한 중환자실에서 눈을 떴을 때, 그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모르긴 해도 많이 두려웠을 터다. ‘여긴 어디지? 어찌 된 영문일까? 취한 중에 사고라도 당한 걸까? 내 팔다리는 멀쩡한 걸까?’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그를 안심시키는 것이었다. 아무 문제 없이 잘 회복 중이라고.

환자의 상태는 빠르게 좋아졌다. 수 시간 만에 삽관 튜브를 제거해냈다. 목에 꽂힌 튜브가 사라지자 그는 말을 쏟아냈다. 그리고 그제야 내 의문이 풀렸다. 의식이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환자의 증언은 충격적이었다. 순간 뒷골이 당길 정도로. 사건 당일, 그는 평소 못 마시는 술을 진탕 마신 후 기억이 끊겼다고 했다. 그랬다. 그는 환자가 아니었다. 그냥 술에 취한 사람이었다. 거기 대고 우리는….

이토록 황당한 일이 또 있을까? 내가 저지른 일이지만 나조차도 어처구니없었다.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백이면 백, 지금쯤 모두 혀를 차고 있을 것이다. “아니, 술 냄새도 못 맡는 돌팔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하지만 나도 변명은 있다. 길거리에 쓰러진 걸 신고한 사람도, 처음 출동했던 경찰도, 인계를 받아 응급실로 이송한 구급대도, 응급실의 수많은 의료진도, 연락받고 도착한 보호자도, 그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쳤지만, 누구도 단 한 번도 음주를 의심조차 해보지 못했다. 바깥 날씨가 추워서였을까? 술은 냄새조차 나지 않았다. 세상은 그렇다.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 종종 일어나는 법이다.

물론 술 때문이란 걸 알았다고 치료가 달라지는 건 아니다. 만취 상태는 원래 위험한 법이니까. 토사물에 기도가 막혀 죽는 사건은 뉴스의 흔한 단골 소재다. 내가 본 환자 중에도 술 때문에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던 이가 있었다. 음주 상태에서 수면제를 먹었는데, 알코올과 수면제가 시너지를 일으킨 남자였다. 그는 거리에서 깊이 잠들었고, 그게 하필 추운 겨울이라 동사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중환자실에서 꼬박 한 달을 매달려서야 겨우 남자를 살려낼 수 있었다.

음주건 뭐건 환자가 혼수상태라면 기관삽관 처치는 틀린 게 아니다. 더구나 응급실에서 생명과 직결되는 처치는 과할 정도로 시행하는 게 실력이기도 하다. 물론 단순 취객인 걸 알았더라면, 쓸데없는 검사는 좀 덜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수백만 원 넘게 나온 병원비는 좀 줄어들었을 터이고.

술을 깨겠다며 응급실에 와서 링거를 놔달라는 진상은 많이 봤지만, 인공호흡기를 달 정도로 의식을 놓은 환자는 처음 보았다. 그는 정말 비싼 술을 마신 셈이다. [사진 Vinicius amnx Amano on Unsplash]

술을 깨겠다며 응급실에 와서 링거를 놔달라는 진상은 많이 봤지만, 인공호흡기를 달 정도로 의식을 놓은 환자는 처음 보았다. 그는 정말 비싼 술을 마신 셈이다. [사진 Vinicius amnx Amano on Unsplash]

그는 정말 비싼 술을 마신 셈이다. 유흥을 위해 하룻밤에 수백만 원짜리 양주를 먹는 사람은 제법 있겠지만, 엉뚱하게 병원비로 그만큼의 술값을 지불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술을 깨겠다며 응급실에 와서 링거를 놔달라는 진상은 많이 봤지만,(응급실은 술 깨러 오는 곳이 아닙니다. 피 철철 나는 응급환자들 사이에서 숙취를 호소하고 싶으신가요?) 술에 꼴아서 인공호흡기를 달 정도로 의식을 놓은 환자는 처음 보았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추운 겨울이었는데, 길거리에서 얼어 죽진 않았으니까. 나는 그에게, 같이 술 마신 동료들이 누구였는지 물었다.

“왜긴요, 그 사람들이랑 다시는 같이 술 마시지 말라고 충고해드리려고 그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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