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조용수의 코드클리어(89)
나는 술 취한 사람을 혼수상태로 오인해 기관삽관을 한 적 있다. 환자는 기계음 가득한 중환자실에서 눈을 떴다. 굵은 튜브가 입을 막고 있어 신음조차 낼 수 없는 상태로. 10여 년쯤 지난 이야기다.
의식불명 환자가 응급실에 실려 왔다. 길거리에서 쓰러진 채 발견된 남자였다. 의식상태는 혼수(COMA). 나는 지체 없이 응급처치에 들어갔다. ABC 중에서 제일 먼저 할 일은 기도(Airway) 확보였다. 입을 통해 굵은 관을 목구멍에 밀어 넣고 그 끝에 인공호흡기를 연결했다. 숨구멍을 열었으니 일단 급한 불은 껐고. 다음 수순은 혼수의 원인을 찾아 치료하는 것인데. 문제가 있었다. 원인이 도통 짐작 가지 않았던 것. 젊은 사람이 왜 쓰러졌지? 사고가 있었을까? 모르겠다. 쓰러진 순간을 목격한 사람이 없다. 지병이 있었을까? 아니. 평소에 건강했다고 한다. CT, MRI, 뇌파 등을 검사해봤지만 어떤 이상도 발견되지 않았다.
만 하루가 지나고, 환자는 정신을 되찾았다. 목구멍에 튜브가 꽂힌 채로. 기계음 가득한 중환자실에서 눈을 떴을 때, 그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모르긴 해도 많이 두려웠을 터다. ‘여긴 어디지? 어찌 된 영문일까? 취한 중에 사고라도 당한 걸까? 내 팔다리는 멀쩡한 걸까?’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그를 안심시키는 것이었다. 아무 문제 없이 잘 회복 중이라고.
환자의 상태는 빠르게 좋아졌다. 수 시간 만에 삽관 튜브를 제거해냈다. 목에 꽂힌 튜브가 사라지자 그는 말을 쏟아냈다. 그리고 그제야 내 의문이 풀렸다. 의식이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환자의 증언은 충격적이었다. 순간 뒷골이 당길 정도로. 사건 당일, 그는 평소 못 마시는 술을 진탕 마신 후 기억이 끊겼다고 했다. 그랬다. 그는 환자가 아니었다. 그냥 술에 취한 사람이었다. 거기 대고 우리는….
이토록 황당한 일이 또 있을까? 내가 저지른 일이지만 나조차도 어처구니없었다.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백이면 백, 지금쯤 모두 혀를 차고 있을 것이다. “아니, 술 냄새도 못 맡는 돌팔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하지만 나도 변명은 있다. 길거리에 쓰러진 걸 신고한 사람도, 처음 출동했던 경찰도, 인계를 받아 응급실로 이송한 구급대도, 응급실의 수많은 의료진도, 연락받고 도착한 보호자도, 그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쳤지만, 누구도 단 한 번도 음주를 의심조차 해보지 못했다. 바깥 날씨가 추워서였을까? 술은 냄새조차 나지 않았다. 세상은 그렇다.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 종종 일어나는 법이다.
물론 술 때문이란 걸 알았다고 치료가 달라지는 건 아니다. 만취 상태는 원래 위험한 법이니까. 토사물에 기도가 막혀 죽는 사건은 뉴스의 흔한 단골 소재다. 내가 본 환자 중에도 술 때문에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던 이가 있었다. 음주 상태에서 수면제를 먹었는데, 알코올과 수면제가 시너지를 일으킨 남자였다. 그는 거리에서 깊이 잠들었고, 그게 하필 추운 겨울이라 동사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중환자실에서 꼬박 한 달을 매달려서야 겨우 남자를 살려낼 수 있었다.
음주건 뭐건 환자가 혼수상태라면 기관삽관 처치는 틀린 게 아니다. 더구나 응급실에서 생명과 직결되는 처치는 과할 정도로 시행하는 게 실력이기도 하다. 물론 단순 취객인 걸 알았더라면, 쓸데없는 검사는 좀 덜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수백만 원 넘게 나온 병원비는 좀 줄어들었을 터이고.
그는 정말 비싼 술을 마신 셈이다. 유흥을 위해 하룻밤에 수백만 원짜리 양주를 먹는 사람은 제법 있겠지만, 엉뚱하게 병원비로 그만큼의 술값을 지불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술을 깨겠다며 응급실에 와서 링거를 놔달라는 진상은 많이 봤지만,(응급실은 술 깨러 오는 곳이 아닙니다. 피 철철 나는 응급환자들 사이에서 숙취를 호소하고 싶으신가요?) 술에 꼴아서 인공호흡기를 달 정도로 의식을 놓은 환자는 처음 보았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추운 겨울이었는데, 길거리에서 얼어 죽진 않았으니까. 나는 그에게, 같이 술 마신 동료들이 누구였는지 물었다.
“왜긴요, 그 사람들이랑 다시는 같이 술 마시지 말라고 충고해드리려고 그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