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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하경 칼럼

차기 대통령은 북한에 당당히 할 말 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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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
이하경 주필·부사장

이하경 주필·부사장

‘북핵 시계’가 2017년 ‘화염과 분노(fire and fury)’ 상태로 되돌아가고 있다. 북한은 새해 극초음속 미사일 등 네 발의 미사일을 발사했다. 4년간 유지돼 온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 유예(모라토리엄)를 깨겠다는 카드도 꺼냈다. 미국과의 담판을 위해 한반도 평화를 뒤흔드는 현상 변경에 나서겠다는 뜻이다. 문재인 정부가 공들인 평화 프로세스가 퇴색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도 미국과 국제사회의 편에 서서 북한에 단호하게 경고해야 한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최종건 외교부 1차관은 문 대통령의 중동 3국 순방 홍보만 했다. 차기 대통령 후보인 이재명·윤석열·안철수 세 사람만 북을 비판했다. 미 국무부만 홀로 북한의 도발을 규탄하는 상황에서 한·미 동맹이 유지될 수 있을까.

북, 핵·ICBM 도발 예고했지만
문재인 정부는 경고 대신 침묵
김대중, 김정일 면전서 비핵 촉구
북한은 신성불가침의 존재인가

문재인 정부가 계승했다는 김대중 정부는 달랐다. 김 전 대통령은 2000년 6·15 정상회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북이 살길은 안보와 경제회생 아닙니까. 그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나라가 바로 미국입니다. 김 위원장은 핵문제 해결을 위한 제네바 북·미 기본합의를 준수하고 미국과의 미사일 회담도 잘해서 조속히 관계개선을 해야 합니다. … (중략) 배타적인 자주가 아니라 열린 자주가 돼야 합니다.”(『피스 메이커』 임동원) ‘햇볕정책’을 추진하면서 “일방적 퍼주기” “대북 유화론자”로 비판받았지만 김정일 면전에서 할 말을 제대로 했다. 그런데 문 대통령의 침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북한은 신성불가침의 존재인가.

만일 김대중이 이 정도로 단호하지 않았더라면 ‘진보 정부’와 ‘불량 국가’ 북한의 정상회담에 국제사회가 등을 돌렸을 것이다. 김대중은 북에서 돌아온 다음 날인 16일 클린턴 미국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미국이 우려하는 핵과 미사일 문제에 대해 김정일 위원장에게 제네바 협정을 엄격히 지키고, 남북 간 비핵화 공동 선언도 꼭 지켜야 한다는 점을 강도 높게 이야기했다”고 알렸다. “김 위원장이 듣기만 했지만 회담이 끝난 후 우리 측 외교안보 담당관에게 ‘미사일 문제는 잘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고도 전했다.

클린턴은 정상회담 성공을 축하하고 “핵과 미사일 문제를 제기해 준 데 대해 감사한다”고 했다. 사흘 만인 19일 미국의 대북제재 완화 조치가 나왔다.(『김대중 자서전 2』) 이후 클린턴은 평양에서 김정일과 만나 미사일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중동 평화회담과 시기가 겹치고,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으로 정권이 넘어가면서 무산되기는 했지만 한·미 정상의 신뢰지수는 급상승했던 것이다.

문 정부는 야당을 배제하고 대북정책을 독점하고 독주해 왔다. 김대중은 그렇지 않았다. 김정일이 “한나라당은 왜 남북관계 개선 문제에 대해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마찰을 일으키는 겁니까”라고 물었다. 김대중은 “우리의 통일 방안은 1989년 현 야당이 집권할 때 (노태우 대통령 주도 아래) 여야 합의로 마련한 것으로 야당이 근본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아요”라고 했다. 또 “한나라당이 집권한다면 지금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정책 방향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라고 했다. 김정일이 “이번 평양 방문에 야당은 왜 한 사람도 보내지 않는 겁니까”라고 따져 물었다. 김대중은 “동행하고 싶어 하는 야당 의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따님인 박근혜 의원도 동행하겠다고 발표했으나 한나라당 지도부에서 허가하지 않아서 아쉽게 된 셈이지요.”라고 했다.

선발대로 간 임동원 국정원장에게 김정일이 “야당인 한나라당은 정부를 비방만 하고 반대를 위한 반대만 일삼는데 이런 것이 민주주의란 말인가요”라고 물었다. 임동원은 “민주주의의 특징은 다양성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야당은 정부의 잘못을 지적하고 예방하기 위한 ‘반대당’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물론 지나친 경우도 없지 않으나 야당이 있는 것이 국가 발전을 위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김대중 정부는 남남 통합이 없으면 남북 화해·협력도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문 대통령은 달랐다. 2018년 4·27 판문점 정상회담 만찬에 추미애 민주당 대표와 우원식 원내대표를 불렀지만 야당 대표는 초대하지 않았다. 이러고도 판문점 선언의 국회 비준을 검토했다니 어이가 없다. 김정은도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가 올 것을 기대하고 응대하는 시나리오까지 준비했는데 나타나지 않자 실망했다고 한다.

핵을 가진 북의 안보 위협이라는 실존적 불안에 눈감고, 야당을 배제하고, 동맹을 무시한 결과가 무엇인가. 북으로부터 “삶은 소대가리”라는 험담을 듣고, 동맹과는 소원해지고, 외톨이가 되는 것이다. 한반도 유사시 북한에 맞설 주한미군을 지원하는 유엔사 후방기지가 있는 일본과는 불편한 사이다. 대만·우크라이나에서 중국·러시아와 대립 중인 미국이 한반도 관리를 소홀히 하면 우리 안보는 불확실성에 휩싸이게 된다. 그래도 좋은가. 차기 대통령은 하늘이 두쪽 나도 북에 당당히 할 말을 해야 한다. 그래야 동맹을 유지하고,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명을 지킬 수 있다. 진정한 대화와 협력도 가능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