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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준혁의 미래를 묻다

허준이 환생하면…과학과 융합한 신 한의학 열었을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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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한의학의 미래

이준혁 한국한의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이준혁 한국한의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수년 전 방영했던 ‘명불허전’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이 드라마에서는 조선시대 명의 허임과 현대 외과의 최연경이 함께 지내게 되면서 겪는 다양한 일화들을 다루고 있다. 서로가 가지고 있는 의학지식과 문화의 차이로 반목과 대립을 하게 되지만, 결국에는 한 아이를 살리기 위해 힘을 합치게 된다는 내용이다. 그 드라마의 주제의식과는 좀 다를 수 있지만, 만약 조선시대 최고의 의학자인 허준이 현대에 다시 태어났다면 동의보감 내용은 무엇으로 채워졌을까.

수천 년간 우리 민족의 건강을 지켜온 한의학과 중국 중의학은 그 뿌리는 같지만, 우리 조상들은 한의학만의 독자적인 이론체계를 정립해오며 한의학을 우리나라 고유의 의학으로 발전시켜왔다. 그 중심에는 ‘동의보감’과 그 저자인 구암(龜巖) 허준이 있었다. 드라마 주인공으로 한류를 사랑하는 세계인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만, 실제 한의학에서 그의 입지는 노벨상 수상 연구자 그 이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준, 당대 동아시아 의학지식 망라
새로운 관점서 한의체계 연 선구자
현대한의학, 과학 통해 재해석 노력
서양의학·한의학은 협력·보완대상

한의학계는 최근 한의 이론을 과학적으로 재해석, 한의 의료 기술의 임상근거를 확보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 한국한의학연구원]

한의학계는 최근 한의 이론을 과학적으로 재해석, 한의 의료 기술의 임상근거를 확보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 한국한의학연구원]

1610년, 허준은 한의와 중의를 총망라해 동의보감을 집필했다. 그 과정에서 당약(唐藥: 중국에서 나는 약재)이 아닌 토산약재를 권장하고, 약재 이름을 한글로 병기하여 채약과 사용을 편하게 하는 등 우리 민족에 맞도록 한의학을 발전시켰다. 나아가 당대 동아시아 의학지식을 종합하며, 이전에 없던 예방의학과 공공의료 개념을 도입하여 새로운 관점에서 한의 의료체계를 이끌었던 선구자였다. 허준이 우리가 사는 2022년으로 돌아와 당대 이론들을 접목하고 발전시켜 한의학의 미래를 이야기하면 어떨까.

허준이 마주한 2022년은 매우 가슴 벅찬 세상일 것이다. 당시 허준은 곳곳에 퍼져있던 동아시아의 다양한 의학지식을 찾고 공부하면서 한의학에 융합하고 접목할 수 있는 새로운 지식을 발견했을 때 가슴이 뛰었을 것이다. 그런 허준이 오늘날의 눈부시게 발전한 과학기술을 한의학에 접목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는 동의보감을 집필했던 그때 이상의 감정을 느낄 것이다. 특히 1차, 2차, 3차 산업혁명을 넘어 초연결, 초지능, 초융합으로 대표되는 4차 산업혁명은 한의학의 무궁한 잠재력을 깨울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벅찼을 것이다.

반면, 1610년 본인이 작성한 동의보감이 비판없이 활용되고 있는 모습을 봤다면 호통을 쳤을 것이다. ‘나의 말과 글에 집착하지 말고 2022년이라는 시대에 맞게 동의보감을 재해석하라’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새롭게 집필할 동의보감은 과학과 데이터를 기반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21세기의 허준들, 즉, 과학자들이 새로운 동의보감을 써 내려 가고 있다. 한의학은 새로운 성장통을 겪고 있다. 이전 패러다임을 통해 구축된 한의학 지식들이 과학과 데이터를 통해서 재해석되는 과정을 겪고 있다. 한의학으로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을 거라는 맹신과 한의학은 과거의 유물이자 근거없는 믿음일 뿐이라는 불신 사이에서, 한의학 이론 체계를 과학적으로 재해석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최근 한의학 연구 동향은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이론과 임상, 진단과 치료 영역이다.  먼저, 이론영역에서는 한의학 전통이론에 대한 원리를 규명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대표적인 한의학 이론인 경혈경락이론을 규명하기 위해서 뇌과학에 대한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최근 국내 연구진과 미국 하버드대 의대 팀이 공동으로 침 치료가 신경 전도속도를 높이고 뇌 감각영역전도의 변화를 일으킨다는 연구결과를 신경학분야 국제 학술지인 ‘브레인’에 발표하기도 하였다. 침이 왜 효과가 있느냐는 질문에 이제는 뇌신경학 이론을 통해 답할 수 있는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사상의학을 기준으로 체질을 진단해주는 기기.

사상의학을 기준으로 체질을 진단해주는 기기.

진단 영역에서는 객관화가 주요한 해결과제다. 기존 한의학의 진단법은 ‘망문문절’(望門問切)이라고 하여, 의사가 오감(五感)을 통해 환자의 상태를 보고, 듣고, 물어보고, 진맥을 하던 방식이다. 이는 의사의 주관적인 요소가 개입되게 되고, 그러다보면 의료인의 경험과 상황에 따른 진단의 오차가 개입할 소지가 크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인체의 오감기관을 확장한 형태의 기기를 통해 정량화된 데이터 형태로 진단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맥진기, 공통화된 설문지, 안면측정기, 설(舌) 진단기 등의 개발을 기반으로, 정량 데이터 확보 노력을 하고 있으며, 향후에는 인공지능(AI) 기술의 도입을 통해 데이터의 활용성을 높이고자 한다.

임상 영역은 데이터를 통한 근거 확보다. 현대의학은 기초에서 시작해서 임상으로 가는 순(順)방향 연구이기 때문에 임상 근거 데이터를 확보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한의학은 이미 임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치료법에 대한 근거를 확보해야 되는 문제가 있다. 기존에는 전통문헌을 토대로 근거를 제시했지만, 이제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문헌적 근거를 과학적인 데이터로 대체해야 한다. 현대 의료소비자들이 가장 크게 지적하는 부분이자 개선 요구사항이기도 하다. 그래서 현재 보건복지부에서는 과학적인 임상데이터를 확보하는 것을 연구·개발(R&D) 사업의 핵심과제로 추진 중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한국한의학연구원에서도 임상 근거확보에 많은 자원을 할애하고 있다. 그 결과물들이 국가한의임상정보포털과 한의임상정보센터 홈페이지를 통해 서비스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치료 영역에서는 새로운 치료법의 개발이다. 이는 고전적인 방식을 현대적으로 바꾸는 방식, 예를 들어 침뜸이라는 고전적인 방식을 전자침·전자뜸 등의 방식 또는 예전에 복용하던 첩약 또는 탕약이라는 방식을 현대적인 제형으로 바꾸는 연구 등이 있다. 이미 전자뜸, 전자침은 상용화가 되어 있고, 약의 제형 또한 대부분의 제형으로 전환이 가능해졌다. 소비자의 기호가 점차 변해가는 만큼 시장에서 차지하는 영역도 점차 고전적인 방식을 대체해 나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고전의 약물지식을 기반으로 신약을 개발하는 연구도 있다. 이미 활맥모과주는 레일라정으로, 청파전은 신바로라는 이름으로 개발되어 활발히 처방되고 있다. 또한, 한약에서 복합적인 물질 속에서 새로운 단일 성분을 찾는 노력도 지속되고 있다.

아마 이러한 성장통을 겪은 한의학의 모습은 지금의 한의학의 모습과 또 달라질 것이다. 한의학을 포함한 의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의 건강이라는 측면에서 동일하다. 안타깝게도 현재는 학문을 활용하는 직능 간의 갈등이 학문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서양의학과 한의학은 경쟁의 상대가 아닌 협력·보완 또는 융합의 대상이 될 것으로 본다. 아마 한의학과 서양의학이 과학과 데이터를 통해 대화할 수 있는 시기가 그때쯤이 될 것이다.

이런 노력이 뒷받침된다면, 미래에는 허준의 바람대로 한의학은 과학화에 성공하고 현대과학과의 융합을 통해 개인마다 다른 체질과 특성을 고려한 맞춤형 진단과 치료에 성공할 것이다. 나아가 진단과 치료를 넘어서 생활·예방·개인맞춤 의학이라는 패러다임으로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나갈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생체 모니터링 결과를 바탕으로 바로 맞춤 처방을 받고, AI 한의사가 바이오센서를 통해 생체정보를 수집·분석하여 맞춤형 진단을 하고 즉석에서 식단과 생활관리법, 치료약을 처방해주는 것도 먼 미래의 일만은 아니다. 한의학은 모든 생활 공간에서 의료를 넘어 의식주 모든 활동에서 일상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당시 예방의학과 공공의료라는 새로운 의료체계를 떠올리던 허준이라면, 현대과학과 융합한 새로운 한의학을 바탕으로 위와 같은 미래를 그렸을 것이다. 이런 미래 이야기가 우리에게 아직 영화 속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머지않아 실현될 미래 디지털 한의학의 모습이라 확신한다. 디지털 한의학을 기반으로 인간의 생애 전주기를 케어하는 무병장수 시대를 꿈꾸며 다양한 한의학 건강관리 시스템 개발을 위한 연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일상생활 정보에 기반하여 아프기 전에 치료하는 사회, 건강 수명이 연장되는 미래가 다가오고 있다. 우리의 연구가 계속된다면 미래에는 한의학 정보들이 분자 수준까지 분석되고, 개인의 특성에 따라 수천 가지로 나누어져 면밀하게 건강을 관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드라마 명불허전으로 넘어가자. 명불허전에 나오는 명대사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다. “여기가 병만 고치는 거 같지? 저 양반들한테는 그냥 침 몇 번 맞고 가는 데가 아니여. 마음을 보듬고 설움을 나누고 그러는데여.” 이 대사가 곧 의료의 본질을 가리키는 거라고 생각한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따라 한의학은 점차 서양의학과 통섭해 가리라 본다. 그래도 그 본질적인 부분은 인간의 건강과 안녕이 될 것이다.

이준혁

한의사 겸 한의학 정책연구자. 경희대 한의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보건정책관리로 석사학위를, KAIST에서 기술경영학으로 박사과정을 마쳤다. 수년간 한의원을 운영했지만, 2007년부터 한국한의학연구원에 들어와 관련 정책을 연구하고 있다. 동국대 한의예방의학 대우교수를 겸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