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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주안의 시선

거짓말 대통령과 지내야할 5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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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강주안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오른쪽)와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가 18일 서울 여의도 ccmm빌딩에서 열리는 소상공인연합회 신년 하례식에 참석, 손팻말을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오른쪽)와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가 18일 서울 여의도 ccmm빌딩에서 열리는 소상공인연합회 신년 하례식에 참석, 손팻말을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자고 나면 새로운 대선 공약이 쏟아진다. 어제 하루만 해도 서울에 주택 48만호가 생겨나고(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 여성이 육아 휴직과 재택근무를 병행한단다(윤석열 국민의힘 후보).

두 유력 후보가 연일 환상적인 선물 보따리를 푸는데도 감흥은 없다. 이들의 말을 믿는 사람이 별로 안 보인다. 50조원을 풀어 온 나라가 돈벼락을 맞을 판이다. 탈모 고민은 건강보험이 해결하고 병사 월급은 200만원으로 오른다. 돈을 펑펑 쓰면 조세 부담이 커질까 걱정되지만, 종합부동산세와 양도소득세를 비롯한 각종 세금은 오히려 줄어든다. 막대한 비용이 어디서 솟는지 신기하다.

자고 나면 쏟아지는 선심 공약

하늘에서 돈이 쏟아지는 공약은 축지법을 쓰고 공중부양을 한다는 허경영 국가혁명당 후보의 창작물이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선 허 후보가 소심해 보일 정도다. 상식의 틀 안에서 안간힘을 쓰는 심상정 정의당 후보와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의 공약이 시시해 보인다.

두 유력 후보의 말의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들이 속한 정당에서조차 귀담아 듣지 않는 기색이다. 대장동과 고발 사주 의혹에 대한 특검 수사가 일례다. 이 후보가 “강력히 특검을 요구한다”며 치고 나가고 윤 후보가 맞장구치면서 곧 특검이 진행될 듯했지만, 여야 모두 딴청이다. 검찰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수사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하는데도 말 잔치뿐이다.

돈 살포 정책 남발에 신뢰 잃어

국가 지도자 발언의 가치가 떨어진 데는 앞서 대선을 치른 대통령들의 책임도 크다. 노무현ㆍ이명박ㆍ박근혜 전 대통령의 취임사를 살펴보면 5년 임기 동안 실천하려는 여러 가지 약속이 눈에 띈다. 노 전 대통령은 취임 때의 약속을 이행하려 노력했다고 평가할 만하다. "동북아 시대의 중심국가로 웅비할 기회"라는 등 방향성을 둘러싼 이견은 있지만, 국민에게 한 얘기를 지키려 했다는 진정성은 인정된다.

경제 대통령을 자임한 이 전 대통령은 성장과 일자리를 강조했다. 그러나 연 7% 성장으로 10년 내 국민소득 4만 달러를 달성해 세계 7위가 된다는 ‘747 공약’은 첫해부터 어긋났다. 그는 "공무원 수를 점진적으로 줄이겠다"고 공언하고 임기 초반 감축을 단행했으나 차츰 다시 늘려 퇴임 무렵엔 1만 명 이상 증가했다.

박 전 대통령 취임사에서 전임자들과 차별화하는 부분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반복한 대목이다. 그러나 임기 중 사상 최악의 참사인 세월호 사고가 발생했다. 선박 안전을 확보하지 못한 부분도 잘못이지만 구조 과정에서 드러난 관련 당국의 무능과 무책임은 국민을 분노하게 했다. 해경 해체를 발표해놓고 시일이 지연되면서 김석균 당시 해경청장은 7개월간 자리를 지키며 ‘장수 청장’ 반열에 올랐고 퇴임식까지 거행했다. 대통령의 말은 이런 과정을 거치며 가치를 잃어갔다.

전·현직 대통령 책임도 작지않아

지난 21일 조계사 대웅전 앞마당에서 열린 조계종 전국승려대회에서 총무원장 원행 스님은 문재인 정부의 종교 편향을 주장하면서 “기회는 불평등했고, 과정도 불공정했으며, 결과도 정의롭지 못했다”고 말했다. 주요 종교 지도자가 대통령의 취임사를 패러디하는 나라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다.

임기가 4개월도 안 남은 시점에서 문 대통령의 취임사를 꺼내보면 첫 대목부터 걸린다.

“지금 제 머리는 통합과 공존의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청사진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보수 정권의 두 전직 대통령은 문 대통령 임기 내내 감옥과 병원을 오가며 지냈다. 여당 소속인 오거돈 전 시장의 성추행으로 치르게 된 지난해 4월 부산시장 보궐 선거를 40여일 앞두고 배를 타고 가덕도 공항 예정지를 돌아봐 선거 개입 논란을 촉발했다.

지난 3일 마지막 신년사에선 “적대와 증오와 분열이 아니라 국민의 희망을 담는 통합의 선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해주 선관위 상임위원의 사표 반려 사태로 선거 중립 의지를 의심케 했다.

취임사로만 보면 문 대통령은 초심에서 가장 멀어진 지도자다. 지금 대선 후보들이 죄책감 없이 즉흥 공약을 남발하는 배경에 약속은 안 지켜도 그만이라는 잘못된 선례가 자리 잡고 있지 않을까.

아직 시간은 있다. 과거 대선은 12월에 치러졌고 퇴임 대통령은 새 대통령이 뜻을 펼 수 있도록 무리한 인사를 자제했다. 문 대통령은 인사철이 지난 3월에 차기 대통령이 뽑히는 첫 사례다. 새 대통령에게 여기저기 알이 박힌 나라를 넘겨줄지 새로운 정책을 힘있게 밀고 갈 공간을 넉넉히 확보해줄지 선례를 남기게 된다. 지금이라도 지난 4년 8개월간 못 지킨 약속 목록을 꺼내 들어 마지막 성의를 다한다면 대통령 공약의 가치가 추락하는걸 조금이라도 막아볼 수 있지 않을까.

강주안 논설위원

강주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