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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 & Review] 중대재해법에 움츠린 기업들…‘구속될라’ 대표 줄사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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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서울에 본사를 둔 토목업체 D사 임원 김모씨는 요즘 걱정이 많다. 27일부터 시행되는 중대재해처벌법(중처법) 대응 때문이다. 정부에서 받은 안전보건 가이드북에 따라 자체적으로 안전지침을 만들었는데, 실제 적용하는데 확신이 서지 않아서다.

예컨대 교통 신호수에 대한 안전 책임 문제가 그렇다. 이 회사가 도로 공사를 수주하고 교통 신호수와 계약하면 안전관리비가 반영된다. 그런데 맨홀 조사를 위해 제3자에게 용역을 주면 이때 인건비는 공사비에 포함되지 않는다. 김씨는 “이런 경우 관리 책임 규정이 명확하지 않다”며 “현장에선 ‘이러다 갑자기 우리가 뒤통수를 맞을 수 있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고 전했다.

중대재해처벌법 주요 내용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중대재해처벌법 주요 내용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중처법 시행이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기업들 사이에서 혼란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다만 최근 광주광역시 화정동 아이파크 아파트 붕괴사고 이후 국민정서가 악화하면서 대놓고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모양새다.

중처법에 따르면 사망자가 1명 이상 발생하고, 사업주나 경영책임자가 안전·보건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면 1년 이상 징역 또는 10억원 이하 벌금을 물린다. 법인에는 50억원 이하 벌금이 부과된다.

산업재해 예방조치 의무 위반 사업장 현황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산업재해 예방조치 의무 위반 사업장 현황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이 같은 엄격한 처벌규정 때문에 현장에선 중대 산업재해로 기업의 명운이 갈릴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한 제조업체 관계자는 “대기업은 그나마 대응이 되겠지만 중소기업은 거의 속절없이 문을 닫아야 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그는 “사업 하다 구속되느니 차라리 사업을 접는 게 낫다는 얘기도 나온다”고 전했다.

대기업이 체감하는 위기의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우조선해양 등은 지난달 사외 협력단 32개사 관계자들을 모아 중처법 강좌를 열었다. 도급·용역·위탁 등 계약 형식과 관계없이 대가(임금)를 목적으로 노무를 제공하면 중처법이 적용돼서다.

상대적으로 재해가 많고, 오너 비중이 큰 건설사에선 대표이사 교체나 ‘최고안전보건책임자’(CSO) 선임이 유행처럼 번졌다. 삼성물산은 독립적인 인사·예산·평가 권한을 가진 부사장급을 CSO로 세웠다. GS건설은 CSO로 사장급을 앉혔다. 일부 중견 건설업체는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했다. 이른바 ‘오너 구하기’다. 장경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법 시행도 전에 건설사의 책임 회피 움직임이 보인다”며 중처법 제정 이후 대표이사에서 물러난 오너인 김상수 한림건설 회장, 최은상 요진건설산업 부회장, 태기전 한신공영 부회장 등을 지목했다.

전문인력 확보에도 비상이 걸렸다. GS건설은 최근 두 자릿수의 현장 안전관리자를 모집한다는 채용 공고를 냈다. 쌍용건설도 안전관리 인력 충원에 나섰다.

일단 인명 사고는 막아야 한다는 위기감에 위험 상황에서 발동하는 작업중지권 사용을 권하는 사업장도 늘고 있다. 전승태 경영자총협회 산업안전팀장은 “그동안 기업들은 생산 손실을 우려해 작업중지권 발동을 꺼렸다”며 “이제는 완전히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국내 한 엔지니어링 업체 관계자는 “최근 10년간 사망사고가 0건이었는데 지난해 2건이 발생했다. ‘1호 케이스’가 안 되길 바랄 뿐”이라며 답답해했다.

공공부문도 비상이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 관계자는 “1호 중대재해가 공공부문에서 나오면 곤란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따지고 보면 중처법 입법을 촉발한 건 공공부문이다. 2018년 12월 공기업인 한국서부발전 태안발전소에서 일하던 협력업체 소속 김용균씨 사망 사건이 결정타였다.

최근 고용노동부 조사에 따르면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 동안 공공기관이 발주하거나 수행한 사업 과정에서 발생한 산업재해 사고 사망자는 244명이나 된다. 한국전력공사·한국농어촌공사·한국도로공사·한국철도공사·한국토지주택공사 등이 특히 많았다. 이 때문에 정부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중대재해가 많이 발생하는 건설부문과 공기업을 거느린 국토교통부, 중대재해 감독·수사 부처인 고용노동부 등을 중심으로 거의 매주 대책회의가 열리고 있다.

안전관리 담당 인력을 채우기 쉽지 않은 건 공공부문도 마찬가지다. 공기업인 A사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에 맞춰 안전관리 전담 부서를 신설하면서 30여 명가량의 담당 인원을 채우는 데 진통을 겪었다. 고용부 산하 한국기술교육대에는 ‘산업안전정책 최고경영자과정’이 오는 3월 개설된다. 비용 절감 등 경영 효율화 압박으로 공공기관이 안전관리 투자를 제대로 늘릴 수 있을지도 의문이 제기된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핵심은 안전경영 시스템이 미흡해 구조적으로 사고가 발생했을 때 처벌된다는 사실”이라며 “경영책임자가 산재 예방을 위해 적극 투자한다면 처벌되는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정부가 분명하게 제시해야 과도하게 팽배한 시장의 공포를 덜고, 법의 순기능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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