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캐롤’ 감독도 영감 받았다, 한 편의 시가 된 사진

중앙일보

입력 2022.01.24 00:03

업데이트 2022.01.24 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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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사울 레이터는 비가 오거나 눈내리는 뉴욕 풍경을 컬러로 즐겨 찍었다. 도시 거리와 사람들의 윤곽이 부드럽게 녹아들어 회화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그의 사진들. 사진은 빨간 우산, 1958년. ⓒSaul Leiter Foundation [사진 piknic]

사울 레이터는 비가 오거나 눈내리는 뉴욕 풍경을 컬러로 즐겨 찍었다. 도시 거리와 사람들의 윤곽이 부드럽게 녹아들어 회화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그의 사진들. 사진은 빨간 우산, 1958년. ⓒSaul Leiter Foundation [사진 piknic]

서울 남산 하얏트호텔 인근 복합문화공간 피크닉(piknic)은 대중교통으로 가기 편한 곳은 아니다. 그런데 요즘 그곳에 관람객 발길이 꾸준히 이어진다. ‘거리 사진의 대가’ ‘컬러사진의 선구자’로 불리는 사진작가 사울 레이터(Saul Leiter·1923~2013) 회고전을 보기 위해서다. 그를 국내에 처음 소개하는 전시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전시 ‘사울 레이터: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는 평생을 거의 무명(無名)으로 활동한 레이터의 작품 300여 점을 보여준다. 생계를 위해 패션잡지 ‘보그’ ‘엘르’ 등의 화보를 찍었는데, 전시된 작품 대부분은 놀라울 정도로 일상의 기록이다. 마치 요즘 스마트폰으로 일상을 찍듯이 그는 60년간 뉴욕 거리와 사람들, 이웃, 친구 모습을 화면에 담았다.

Pull, 1960년. ⓒSaul Leiter Foundation [사진 piknic]

Pull, 1960년. ⓒSaul Leiter Foundation [사진 piknic]

미국 피츠버그 출신인 레이터는 12세가 되던 해 어머니한테 카메라를 선물 받아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유대교 집안에서 랍비 교육을 받은 그는 20대에 고향을 떠나 뉴욕에 정착했다. 이후 평생 뉴욕에서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렸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80세를 넘긴 2000년대 중반에야 1940년대 말부터 찍은 컬러사진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대규모 회고전인 이번 전시에선 1940~50년대 컬러 및 흑백 사진, 50~60년대 패션 화보, 미공개 컬러 슬라이드와 더불어 사진과 회화를 결합한 페인티드 누드 작품을 소개한다.

Untitled, 1950년대. ⓒSaul Leiter Foundation [사진 piknic]

Untitled, 1950년대. ⓒSaul Leiter Foundation [사진 piknic]

먼저 눈길을 끄는 건 컬러 사진이다. 흑백사진이 주류였던 1940년대부터 컬러로 촬영한 초기 작품은 시대를 앞서간 남다른 감각을 엿보게 한다. 렌즈에 잡힌 피사체는 문이나 기둥에 가려 한 부분만 보이거나, 비나 눈이 오는 날 김이 서린 창문 너머로 포착돼 윤곽이 희미해 보인다. 가디언은 “사진에서 사람들은 흐린 실루엣 정도로 보이곤 한다”며 “추상화가의 시선으로 삶을 바라봤다”고 평했다.

사울 레이터

사울 레이터

창을 통해 보는 풍경도 눈에 많이 띈다. 레이터는 “난 그저 누군가의 창문을 찍는다. 뭐 대단한 업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사진 하나하나가 ‘지금 이 순간’ ‘여기 있는 사람’에게 바친 그의 헌사로 읽힌다. 그의 인생을 담은 다큐영화 ‘사울 레이터: 인 노 그레이트 허리(In No Great Hurry)’에서 그는 “세상 모든 것은 사진으로 찍힐  만하다”고 말했다.

레이터는 눈 내리는 풍경과 눈 오는 날 우산 쓴 사람들의 모습을 집요하게 찍었다. 대표작 ‘붉은 우산’(1958)도 그중 하나다. 토드 헤인즈 감독은 영화 ‘캐롤’을 찍을 때 그의 사진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이름이 알려지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2005년 맨해튼에서 개인전을 열고, 2006년 독일 슈타이들 출판사에서 사진집을 냈다.

레이터는 작품 사진을 인화하는 대신 환등기로 거실 벽에 비춰보는 것에 만족했다. 국내 전시를 기획한 피크닉 관계자는 “레이터는 대중에게 자신을 알린다는 열망 없이 사진 찍기 자체를 즐긴 사람이었다”며 “사망했을 당시 인화하지 않은 슬라이드 필름이 매우 많았다”고 전했다. 2013년 89세로 세상을 떠나자 뉴욕타임스는 “일찍이 뉴욕을 컬러로 촬영한 작가이며, 우리 시대 최고 사진작가 중 한 명”이라고 소개했다. 전시는 3월 2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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