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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선교사들, 동아시아인 와인으로 유혹해 포교 활동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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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2호 27면

와글와글

이기지가 서양신부 비은을 만나 와인을 처음 체험한 남당(南堂). [사진 손관승]

이기지가 서양신부 비은을 만나 와인을 처음 체험한 남당(南堂). [사진 손관승]

탕 루오왕(湯若望)은 죽음을 석 달 앞두고 기억이 비상한 코레아 환관을 불렀다. 정신이 더 혼미해지기 전에 중국에서의 활동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그 조선인은 ‘코리아 렉스(Corea Rex)’가 귀국하면서 체계적인 교육을 해달라고 맡겨놓았던 내시(內寺) 출신이었다. 17세기 독일에서 라틴어로 출판된 ‘중국 포교사’에 수록된 내용이다.

탕 루오왕의 본명은 요한 아담 샬 본 벨, 흔히 아담 샬로 불리던 독일 출신 예수회 신부로 청나라의 과학기술을 총괄하던 흠천감정(欽天監正·기상청장) 직위에 오른 탁월한 능력자였다. 그럼 ‘코리아 렉스’는 누구인가? 렉스는 라틴어로 왕을 뜻하며 삼전도의 굴욕을 겪은 뒤 볼모로 심양까지 끌려갔던 소현세자를 의미한다. 청나라가 중원을 통일하게 되는 1644년 함께 북경에 가게 되는데, 이때 아담 샬과 짧지만 매우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중국 포교사에는 소현세자가 아담 샬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가 라틴어로 번역, 수록돼 각별한 우정을 느끼게 한다.

17세기 중국에서 활동한 독일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 [사진 위키백과·바이두]

17세기 중국에서 활동한 독일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 [사진 위키백과·바이두]

“마치 같은 피로 맺은 친구처럼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게 됐습니다. 자연의 어떤 숨겨진 힘이 우리를 이렇게 맺어주었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학문에 의해서 연결된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북경 남당의 주임신부였던 황비묵도 ‘정교봉포’라는 책에서 비슷한 증언을 하고 있다. 소현세자가 귀국하게 되자 아담 샬로부터 서양 학문과 종교를 체계적으로 배우고 돌아오라고 북경에 남겨둔 수행원이 바로 ‘기억이 비상한 코레아 환관’이었다. 그 조선인은 이후 20여 년 동안 아담 샬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옆에서 보좌했다고 한다. 특이한 운명을 지닌 이 조선인은 누구였을까? 아쉽게도 그 이름과 세례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여러 가지 정황을 살펴볼 때 그가 이승훈보다 훨씬 먼저 북경에서 세례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보다 앞서 서양인과 접촉한 이는 정두원으로 1631년(인조 9년) 중국에서 포르투갈 출신 선교사 조앙 로드리게스로부터 조선 최초의 망원경인 천리경, 서포(西砲), 자명종, 중국어로 저술된 서양 서적 네 권, 세계 지도를 들여왔다. 이런 상황을 두루 살펴봤을 때 정두원과 소현세자와 ‘코레아 환관’ 가운데 누군가는 서양 포도주를 체험했을 것 같다. 가톨릭의 종교의식과 16세기와 17세기 예수회의 동아시아 선교정책인 ‘적응주의’에서 와인이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적응주의(Accommodation)란 예수회 선교사 알렉산드로 발리냐노가 주도한 것으로 대항해 시절 남미와 일부 아시아에서 행해졌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선교방식이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남미에서 그 지역의 전통문화와 관습을 송두리째 없애 ‘타불라 라사(Tabula rasa·백지선교)’라는 악명을 듣고는 했지만, 적응주의는 해당 지역의 언어·문화·역사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한 근대적 선교 방식이다. 일본과 중국을 찾아온 유럽 선교사들은 해당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했고 복장도 그 나라 방식을 따랐다. 적응주의 선교 방식은 훗날 글로벌 기업의 현지화 전략의 모델로 연구될 정도로 탁월했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는 중국에서 서양 신문물을 익혔다. [중앙포토]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는 중국에서 서양 신문물을 익혔다. [중앙포토]

특히 엘리트 계층을 상대로 한 대화나 선교에서 포도주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7세기 일본에서 발간된 ‘다이코기’(太閤記)라는 책에 따르면, 서양 선교사들이 술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포도주, 술 못 마시는 이들에게는 카스텔라와 캐러멜을 주면서 유혹했다고 언급할 정도였다. 당시에 일본인들은 포도주를 가리켜 ‘친타슈’(珍陀酒)라 불렀는데, 포르투갈어로 붉다는 뜻의 틴토(tinto)를 일본식으로 발음한 ‘친타’와 술(酒)을 뜻하는 ‘슈’를 합친 단어였으니 레드와인이란 뜻이다. 동아시아와 유럽이 처음 만날 때 와인이 윤활유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와인통

와인통

1720년 북경을 여행했던 서른 살의 여행자 이기지는 해외에서 서양인으로부터 와인을 받아 마시고 레시피까지 기록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가 남긴 여행기 ‘일암연기’에 따르면 천주당을 일곱 번 방문하고 세 번 답방을 받는 동안 여러 차례 와인을 체험한다. 1720년 10월 10일(음력)의 기록에는 ‘색은 검붉고 맛은 매우 향긋하고 상쾌하다’는 시음기와 ‘서양 포도는 중국 것보다 열매가 크고 맛도 뛰어나며 그 포도로 술을 빚으면 수십 년이 지나도 부패하지 않는다’는 비은(費殷)의 설명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북경에서 만난 여러 명의 서양인 선교사 가운데 한 명으로 오스트리아 출신에 본명은 자비에르-에른베르트 프리델리, 이미 만주지역과 압록강과 도문강의 위치를 측량하는 프로젝트를 위임받았을 정도로 수학과 과학에 재능이 있었으며 나중에는 남당의 책임 신부로 활동했다. 그에게 카스텔라로 추정되는 ‘서양 계란떡’을 받거나 푸른 유리병에 담은 포도주 한 병을 전달받아서 아버지에게 전하기도 했다.

부친 이이명은 우의정, 좌의정을 거친 당대 최고의 실력자였는데 그가 연행사(燕行使)의 단장으로 가게 되자 비공식 수행원인 ‘자제군관’ 자격으로 북경을 가게 됐다. 이기지는 북경 뒷골목인 후동을 열심히 뒤지고 다니고 가톨릭 성당에서 서양인들과 만나 천문과 과학에 관해 깊이 있는 담론도 나눴다. 북벌이란 개념밖에 모르던 조선 사회에 북학의 씨앗을 심어준 계기였다.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쓰게 된 것은 그로부터 60년 뒤의 일이었다. 박지원, 홍대용이 북경을 가서 창의적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자제군관 자격 덕분이었다. 북학파 지식인들은 선배 여행자 이기지의 와인을 그리워하며 18세기 후반 ‘조선의 그랜드투어’라는 새로운 붐을 일으켰다. 북경의 천주당이 서양인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던 것처럼, 포도주는 답답한 반도에서 벗어나 넓은 세상을 동경하는 이들에게 로망으로 비춰졌다. 근대의 조선 지식인에게 와인은 서양의 동의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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