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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와 교역, 투쟁과 평화가 물결친 바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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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2호 20면

바다 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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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인류
주경철 지음
휴머니스트

바다가 왜 중요한지 물으면 답변처럼 쓰이는 유명한 말이 있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교역을 지배한다. 세계의 교역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의 부를 지배하며 결국 세계 자체를 지배한다.”

영국 군인이자 시인·탐험가로도 불리는 월터 롤리(1552?~1618) 경의 말이다. 서양사학자 주경철 서울대 교수의 신작 『바다 인류』는 이 말을 소개하며 이렇게 부연한다. “근대 유럽인의 심성을 잘 나타낸” 말이자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겠다는 언설은 다른 문명권의 텍스트에서는 보기 힘든 표현”(464쪽)이라고.

『바다 인류』는  『대항해 시대』(2008. 서울대학교출판부)로 해양의 관점에서 근대사를 재조명한 저자의 새로운 역작이다. 이번에는 인류사 전체로 범위를 넓혔다. 본문만 900쪽 가까운 방대한 분량인데 통독의 재미가 있다. 동·서양의 이분법이나 서구 중심의 시각 대신 여러 바다를 넘나들며 역동적·입체적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촘촘히 펼쳐낸 덕분이다. 지중해 주변의 전쟁·교역은 물론이고 말레이반도 말라카해협을 장악하는 세력의 부상, 동남아에서 아프리카 동부까지 이어진 인도양 교역의 연쇄 등이 그야말로 ‘세계사’를 읽는다는 실감을 준다.

14세기 일본으로 가다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한 중국 선박 신안선. 목포해양유물전시관에 복원돼 있다. 배에 실린 800만개의 동전은 중국의 팽창주의적 화폐정책을 짐작하게 한다. [사진 휴머니스트]

14세기 일본으로 가다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한 중국 선박 신안선. 목포해양유물전시관에 복원돼 있다. 배에 실린 800만개의 동전은 중국의 팽창주의적 화폐정책을 짐작하게 한다. [사진 휴머니스트]

중국에서 득세한 이슬람 출신 ‘포’씨 상인들, 고대 해양 강국 페니키아 얘기도 재미있다. 페니키아 식민지 한 곳은 염장 능력이 뛰어나 소금에 절인 참다랑어를 항아리에 담아 멀리까지 수출했단다. 저자는 이를 ‘참치 캔의 원조’라고 표현한다. 한국사도 눈에 띈다. 신라로 귀국한 장보고의 활동, 몽골의 일본 원정이 ‘고려사’에 남긴 기록, 신안 앞바다 침몰선에서 동전이 쏟아진 배경, 19세기 초 평안도의 콜레라 등이 세계사의 맥락 속에서 언급된다.

특히 대규모 원정 이전에 해상교류의 네크워크나 다양한 문화권의 상인들의 릴레이 중개무역을 통해 각 지역의 원거리 교역이 꾸준히 이어진 역사가 곳곳에서 드러난다. 인도양은 비교적 장기간 그랬다. 저자는 “상대적인 평가이기는 하지만 지중해가 끊임없는 ‘투쟁의 바다’였다면 인도양은 ‘평화의 바다’라 할 만했다”(160쪽)고 평한다.

이 책의 시작은 고대 문명 훨씬 이전이다. 빙하기로 해수면이 낮았던 수만 년 전부터 아프리카를 벗어난 인류의 이동은 오스트레일리아처럼 바다 건너까지 향했다. 사안마다 새로운 시각과 연구를 적절히 담아내 입체감을 더한다. 예를 들어 태평양 섬들까지 인류가 다다른 과정을 16세기 유럽인들은 우연한 표류의 결과로 상상했는데, 바람·해류 방향을 고려하면 불가능한 일이란 설명, 18세기 쿡 선장의 기록이나 1970년대 시작된 실험이 카누로 원거리 항해가 가능하다고 입증한 사실 등이 이어진다.

물론 근대 유럽의 해양 진출, 이와 대조적인 중국의 해양 후퇴라는 거대한 전환점은 이 책에서도 중요한 대목이다.  정화의 대규모 원정이 과시한 대로 해양력 전성기의 중국은 대내적으로 남북을 잇는 대운하를 정비하면서 대외적으로는 교역을 금지하고 바다에서 스스로 후퇴했다. 역사학자들이 놀라워하는 일이다. 대운하는 결과적으로 중국의 쇠퇴를 부른 셈이다. 중국의 후퇴는 지금의 오키나와에 자리했던 류큐 왕국이 중개무역으로 부상하는 결과도 불렀다.

근대 유럽의 해양 진출에는 전례없는 폭력이 뒤따랐다. 무력을 앞세운 점령이 전염병 확산과 원주민 노예화, 생태계 변화를 부르는 과정은 대서양 길목에 자리한 카나리아 제도 같은 곳부터 겪기 시작했다. 이 책은 노예무역을 비롯한 비극적 이주사를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의 해양 진출 방식을 비교하는 것 못지않게 비중있게 다룬다.

이 책에 담긴 인류사는 바다가 활동의 장벽이 아니라 소통의 공간이 된 역사이기도 하다. 19세기 중반까지 말과 범선을 이용한 인간의 하루 최대 이동 거리는 160㎞였는데 증기선과 철도의 연결로 640㎞까지 늘어난다. 수에즈 운하 개통, 해저 케이블 등도 물리적·시간적 거리를 줄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허나 해피엔딩은 멀다. 책은 군사 경쟁과 영토 분쟁, 기후 변화와 환경 오염 등 현대의 바다가 직면한 위기와 해저 도시 등 새로운 도전까지 조명한다. 저자는 바다가 그 어느 때보다 심층적·다차원적으로 이용되는 동시에 악용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태평양 얘기를 곱씹게 되는 것은 그래서다. 태평양 세계를 ‘광대한 바다로 둘러싸인 섬들’이 아니라 ‘섬들로 구성된 바다’라고 표현한 사람은 책 초반에 인용되는 인류학자이자 작가 에펠리 하우오파(1939~2009)다. 바다 때문에 고립된 게 아니라 바다를 통해 연결됐다는 시각이다. 이 책에 따르면, 다른 섬에서 오는 사람들을 통가에서 ‘타히’라고 부르는데 원뜻은 ‘바다에서 온 사람들’이란다. 이들에게 바다는 고향, 이웃 섬에서 오는 사람들도 동향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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