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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좌에 오른 ‘악인의 표본’…“딱 요즘 시대 이야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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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2호 19면

[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황정민의 연극 ‘리차드 3세’ 

연극 ‘리차드 3세’. [사진 샘컴퍼니]

연극 ‘리차드 3세’. [사진 샘컴퍼니]

지난주 ‘오징어게임’ 오영수 배우의 골든글로브 수상 소식으로 떠들썩했다. 정작 본인은 별일 아니라는 듯 인터뷰도 사양하고 매일의 연극 공연을 이어갔는데, 오히려 그 바람에 연극과 연극배우라는 직업이 새삼 주목받는 분위기가 됐다. 이런 시기에 때마침 연극의 매력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무대가 열렸으니, 바로 ‘리차드 3세’(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2월 13일까지)다.

2018년 배우 황정민의 10년만의 연극 복귀작으로 화제를 모아 객석점유율 98%를 기록했던 작품인데, 4년만의 재연이 더 눈길을 끄는 건 요즘 대선 시국의 주인공들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권력이 무섭다’는 걸 알면서도 사생활이 발가벗겨지고 온가족의 민낯이 드러나 국민적 조롱거리가 되면서까지 권력을 잡고 싶은 욕망의 근원이 궁금한데, 셰익스피어 연극을 보니 먼 옛날 영국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권력무상의 화신’과도 같은 ‘리차드 3세’는 셰익스피어가 1583년경 쓴 초기 역사극으로, 장미전쟁을 배경삼아 15세기 영국 요크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실존인물 리차드 3세(1452~1485)를 사악한 욕망의 화신으로 그렸다. 곱추에 절름발이 추남으로 태어난 글로스터 공작이 신체적 핸디캡을 증오로 불태우며 권력욕에 눈뜨게 되고, 갖은 중상모략과 권모술수로 ‘왕좌의 게임’에서 승리하지만 금세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는 허무한 이야기다.

연극 ‘리차드 3세’. [사진 샘컴퍼니]

연극 ‘리차드 3세’. [사진 샘컴퍼니]

일찌감치 인간의 변하지 않는 권력의지와 욕망에 현미경을 댔다는 점에서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와 유사하지만, 서재형 연출이 “셰익스피어 36편의 희곡 중 가장 정리가 안 된 작품”이라고 할 만큼 극적으로 완성도 높은 이야기는 아니다. 강렬한 비주얼을 앞세운 한 캐릭터의 악행 열전이랄까. 엘리자베스 1세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았던 셰익스피어가 튜더 왕조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리차드 3세를 세상 둘도 없는 악당으로 묘사한 것이다.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형제들을 이간시키고 친형과 어린 조카들을 죽이는 건 시작에 불과하다. 자신이 시아버지와 남편을 죽인 여인과 밀당 끝에 결혼하는가 싶더니 곧바로 왕권 강화를 위해 죽여 버린 후, 역시 자신이 죽인 조카들의 누이와 결혼을 하는 피의 막장드라마가 내내 휘몰아친다. 결핍에서 비롯된 권력욕이지만, 피의 숙청으로 얻은 권력에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두려움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피를 부른다.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가장 매력적인 악인’이라는 평가처럼, 이 ‘악인의 표본’에게는 어딘지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잔인하고 교활하며 곱추에 추남이지만, 초반부터 쿨하게 ‘난 뒤틀린 사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없듯 나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트라우마를 고백하며 관객 마음에 훅 들어온다. 적당히 인간적이고 유머감각을 내재한 호탕한 ‘셀프디스’가 상대를 무장해제시킨다는 걸 알았던 걸까.

‘국민배우’ 황정민의 메소드 연기에 방점이 찍히는 이유다. 황정민은 곱사등이 특수분장 외에는 별다른 장치의 도움없이 온전히 연기로 리차드 3세가 된다. 허리를 45도로 구부리고 한쪽 팔은 비틀어 축 늘어뜨렸고, 거의 스쿼트 자세로 무릎을 굽힌 채 안짱다리로 대부분의 장면을 종횡무진하는 ‘극한직업’이다. 그런 불편한 비주얼을 100분 동안 유지하면서 결핍과 욕망, 공포와 불안 등의 심리를 광기 넘치게 묘사하는 그는 마치 ‘연극의 이데아’를 주장하는 듯 하다.

연극 ‘리차드 3세’. [사진 샘컴퍼니]

연극 ‘리차드 3세’. [사진 샘컴퍼니]

사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연극은 제의였고, 디오니소스 신에게 빙의된 연기자에게 관객이 몰입함으로써 원형 극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공감대로 뭉쳐지는 고유의 미학이 성립했다.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라는 말도 있듯이, 제사장처럼 강렬한 아우라를 가진 배우가 관객을 빨아들이는 데 본질이 있는 것이다. 황정민이 연극을 하는 이유도 거기 있는 것 같다. 지난주 기자 간담회에서 그는 “연극학도일 때 고전극을 많이 하는 선배들을 동경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며 클래식의 위대함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다”면서 “고전극을 보존하는 선배의 모습을 후배들에게도 보여주고 싶고, ‘리차드 3세’는 연극에서만 가능한 시적 표현들의 대사화를 배우들이 공부하기에 정말 좋은 작품이라는 게 매력”이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이런 고전 연극은 ‘보존’해야 할 정도로 점점 귀해져 간다. 팬데믹 여파로 훌쩍 앞당겨진 디지털 미디어 세상에서 연극은 스스로 존재 의의를 질문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지난해 팔순이 훌쩍 넘은 나이에 원캐스트로 ‘리어왕’을 공연한 이순재 배우나 오영수 배우가 출연하는 ‘라스트 세션’의 흥행처럼, 늘 그 자리에서 굳건히 무대를 지켜온 대배우들만이 ‘클래식의 위대함’을 지탱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연극은 결코 낡지 않는다는 데에 묘미가 있다. 연극배우들이 과장된 몸짓과 화법으로 확대경을 들이대는 것은 영원히 반복될 인간들의 원죄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악행은 내가 저지르고 통탄할 책임은 남들에게 미루기 위한 손쉬운 방법. 벌거벗은 악당 몸에 성경에서 훔쳐온 낡은 명언 조각을 딱 걸쳐주면 사악한 악마 노릇에 열중하고 있는 동안에도 성인으로 보인단 말이지”라는 리차드 3세의 대사를 두고 황정민이 “기가 막힐 정도로 공감이 가는, 딱 요즘 시대 이야기”라고 했듯이 말이다.

여운이 긴 것도 그래서다. “그대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는가. 그대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는가.” 소리꾼 정은혜가 연기하는 마가렛 왕비가 특유의 무대화술로 시종일관 던지는 이 질문이 어느 순간 리차드 3세가 아니라 관객을 향한 것임을 깨닫게 될 때, 소름이 돋는다. 한 외로운 소년을 ‘악인의 표본’으로 키운 것도, 그를 왕좌에 앉힌 것도, 다름 아닌 ‘그대들’이란 호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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