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교통부가 유럽연합(EU)을 상대로 항공사 슬롯 의무면제 설득에 나선 것으로 20일 확인됐다. 정부는 EU에 슬롯 의무면제 요구사항을 담은 문서를 조만간 발송할 계획이다. 슬롯(slot)은 항공기가 공항에서 이·착륙을 하거나 이동하기 위해 배분된 시간을 뜻한다.
사연은 이렇다. EU는 올해 초 유럽에 취항하고 있는 글로벌 항공사에 할당받은 슬롯의 64%를 채우라고 요구했다. 슬롯 의무화 조치는 올해 여름 시즌부터 시작된다. 이번 결정으로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등 유럽 각 지역에 취항하고 있는 항공사는 배정받은 슬롯을 의무적으로 채워야 한다. EU는 “슬롯을 채우지 않으면 사용 권한을 박탈하겠다”는 엄포도 놨다. 이에 국토교통부는 EU를 상대로 슬롯 의무면제(waiver)에 나선 것이다.
EU의 슬롯 의무화 조치는 처음이 아니다. EU는 2021년 동계 시즌에도 슬롯 의무화를 꺼내 들었다. 동계 시즌의 경우 의무비율은 50%였으나 정부가 EU에서 의무면제를 받아 할당받은 슬롯을 채우지 않아도 됐다.
현재 유럽에 취항하고 있는 한국 항공사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두 곳이다. 대한항공은 파리·런던·바르셀로나 등에 취항하고 있다. 아시아나항공은 런던과 프랑크푸르트 노선을 운영하고 있다. 두 항공사는 정부와 손잡고 EU 설득에 나섰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코로나19 영향으로 국제선 운항 회복이 요원한 가운데 EU가 제시한 64% 슬롯 소진율에 맞춘 운항 횟수 확대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다”며 “동계기간 EU 50% 슬롯 소진율 적용을 놓고 정부와 협의해 개별 공항 당국에 운항 제한 사유서를 제출해 의무 면제를 적용받은 전례도 있다”고 말했다. 아시아나항공 관계자는 “정부의 슬롯 의무면제 설득과 별개로 각 국가의 슬롯 담당자들에게 조건 완화와 함께 기존에 배정받은 슬롯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EU발 슬롯 의무화에 국제항공운송협회(IATA)도 나섰다. IATA는 지난해 연말 입장문을 통해 “슬롯 의무화는 점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며 “급격한 슬롯 의무화 조치는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IATA까지 나선 건 슬롯 의무화 조치에 따른 유령비행기(ghost flights) 문제 때문이다. 슬롯을 유지해야 하는 항공사는 승객이 없는 여객기를 일부러 띄워 슬롯 기준을 맞추고 있다. 항공업계에선 이를 유령비행기라 부른다. 한국 항공사 두 곳은 동계 시즌에 슬롯 의무를 면제받아 유령비행기를 띄우지 않아도 됐지만 하계 시즌에는 EU가 슬롯 의무화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어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다. 항공업계에 따르면 유럽행 항공편 이용률은 평년 대비 30% 수준에 그치고 있다.
환경 이슈로 번지는 슬롯 의무화
EU의 슬롯 의무화 조치는 환경 이슈로 번지는 중이다. 승객이 없는 유령비행기를 띄우는 게 세계적인 온실가스 저감 노력에 반한다는 것이다. 환경운동가인 그레타 툰베리는 올해 초 트위터에서 “브뤼셀항공은 슬롯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지 않은 항공기 3000편을 띄웠다”며 “EU가 환경 정책에 반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독일 루프트한자는 “겨울 시즌에 슬롯 유지를 위해 승객이 없는 여객기 1만8000대를 띄워야 했다”며 EU 정책을 비판했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다른 항공사들까지 감안하면 여객기 수만대가 유령처럼 겨울 하늘을 날아다니는 셈이다.
이에 대해 EU는 “코로나로 피해를 입은 각국 공항과 직원도 생각해야 한다”며 “슬롯 의무화는 항공사 간 공정한 경쟁을 위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미국 주요 공항도 슬롯 의무화를 유예하고 있지만 이를 언제 되돌릴지 예측하기 힘들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7일 “뉴욕 케네디 국제공항과 워싱턴 로널드 레이건 공항은 올해 3월까지 국제선 항공편에 대해 슬롯 의무를 면제한 상태”라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