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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쳐들어오는데…코미디언 출신 우크라 대통령 엉뚱한 행동 [후후월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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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월드]는 세계적 이슈가 되는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을 파헤쳐 보는 중앙일보 국제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우크라이나의 아이들은 나쁜 환경에서 태어나 나쁜 선택만 강요받는다. 그리고 그 삶은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정치인들이 권력만 잡으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지난 2015년 10월 처음 방송된 우크라이나의 국민 드라마 ‘국민의 종’(Servant of the People) 첫 화에 나오는 대사다. 드라마 속에서 소시민이자 고등학교 역사 교사인 주인공은 국민의 삶보단 자신의 이익을 먼저 챙기는 정치인들에 분노하며 욕설을 쏟아냈고, 우연히 찍힌 이 모습이 SNS를 통해 인기를 끌면서 결국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

블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주연을 맡은 ‘국민의 종’은 2015년 첫 방영 이래 높을 시청률을 기록하며 우크라이나 국민 드라마가 됐다. 그는 당시 드라마에서 현실정치에 무모하게 부딪치는 교사를 연기했다. [유튜브 캡처]

블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주연을 맡은 ‘국민의 종’은 2015년 첫 방영 이래 높을 시청률을 기록하며 우크라이나 국민 드라마가 됐다. 그는 당시 드라마에서 현실정치에 무모하게 부딪치는 교사를 연기했다. [유튜브 캡처]

그 역할을 연기했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는 4년 뒤 실제로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이 됐다. “강력한 정치적 견해나 공약이 없다”(BBC)는 우려 속에서도 깨끗한 정치 신인임을 앞세워 결선 투표에서 73.2%라는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우크라이나 국민은 17살에 러시아 코미디 TV쇼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코미디언에게 희망을 걸 만큼 전직 대통령들의 부패와 무능에 진저리를 쳤다. 그러나 12만7000명의 러시아군이 침공 준비를 완료한 위기 속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국민의 기대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왼쪽부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AFP=연합뉴스]

왼쪽부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AFP=연합뉴스]

러시아군 침공 위기 속 정적에 집중

19일(현지시간)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우크라이나는 전·현직 대통령 간 갈등으로 지지 세력이 분열돼 있다. 이날 우크라이나 법원이 국가 반역 혐의를 받고 있는 페트로 포로셴코 전 대통령에 대해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내분은 더 심화되고 있다. 영장실질심사가 진행된 법원 주위에는 포로셴코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인파가 몰려들며 경찰과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의 지지자들은 대통령궁을 향해 걸으며 젤렌스키 대통령에 대해 항의시위를 하기도 했다.

반역 혐의를 받는 페트로 포로셴코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17일(현지시간) 키예프 공항에 도착해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다. [EPA=연합뉴스]

반역 혐의를 받는 페트로 포로셴코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17일(현지시간) 키예프 공항에 도착해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다. [EPA=연합뉴스]

포로셴코 전 대통령은 지난 2019년 대선에서 젤렌스키에 패배하며 재선에 실패한 정치적 라이벌이다. 그는 재임 초기였던 2014~2015년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 친러시아 분리주의 세력의 자금조달을 돕는 대량 석탄 판매에 관여했다는 혐의로 조사 받던 중 지난달 폴란드로 출국했다가 17일 우크라이나로 복귀했다. 귀국 당시 일성은 “위기에 처한 조국을 돕기 위해 돌아왔다. 젤렌스키는 나와는 전혀 무관한 혐의를 내게 씌워 숙청을 자행하려 했으며, 그는 러시아의 공격에 대해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였다.

나라가 풍전등화인데 전·현직 지도자들이 단합은커녕 정치 싸움을 하는 형국이다. 지난 17일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우크라이나와 서방 간의 회담에서 소외된 젤렌스키 대통령이 국내 문제에 치중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19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을 만난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도 “러시아에 대항하는 우크라이나의 리더들이 단합된 전선을 형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 요직에 코미디언 동료들

정치 경력이 거의 전무한 젤렌스키 대통령이 현재 우크라이나 사태의 원흉일 리는 없다. 그러나 2019년 집권 이래 국정 수반으로서 그의 행보는 아마추어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특히 전문성을 가진 내각을 구성하는 대신 정부 요직에 친지와 코미디언 동료들을 대거 앉힌 점이 비판 받고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지난 2019년 치러진 우크라이나 대통령선거 당시 투표 이후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들어 보여주고 있다. [AP=뉴시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지난 2019년 치러진 우크라이나 대통령선거 당시 투표 이후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들어 보여주고 있다. [AP=뉴시스]

지난달 뉴욕타임스(NYT)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정부 주요 요직에 TV 프로그램 제작업체인 ‘크바르탈95 스튜디오’ 소속 옛 동료들과 일가친척을 채우고 있다고 전했다. 현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부서라고 할 수 있는 외교와 국방 관련 보직에도 배우와 연출가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서다.

앞서 드미트로 라줌코프 전 우크라이나 하원의장은 “우크라이나 정치는 마치 한 편의 코미디 호러 드라마와도 같다”며 “전문가가 없는 정부, 외교관이 없는 외교부, 장군이 없는 군 지휘부가 언제 붕괴할지 아무도 모른다”고 비판했다.

젤렌스키 개인 축재도 의심받고 있다. 지난해 10월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가 공개한 ‘판도라 페이퍼스(문건)’는 그가 조세 회피처에 페이퍼 컴퍼니(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회사)를 설립해 거액의 재산을 은닉하고 탈세를 해왔다는 의혹을 자아냈다. 대통령 선거 때부터 잡음이 많았던 우크라이나의 금융 재벌인 이고르 콜로모이스키와 유착 관계라는 의구심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오른쪽)이 19일 키예프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만나 팔꿈치 인사를 나누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오른쪽)이 19일 키예프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만나 팔꿈치 인사를 나누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없는 우크라이나 회담부터 타개해야  

젤렌스키 대통령은 대선 후보일 당시 “돈바스 지역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라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직접 대화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정작 2014년 크림반도 사태 이래 가장 큰 위기 상황임에도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협상 상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신세다. 지난 10일 미국‧러시아 간 고위급 회담 때도, 12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ㆍ나토)와 러시아의 회담 때도 우크라이나가 낄 틈은 없었다. 13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유럽안보협력기구(OSCE)와 러시아의 회담에 겨우 참여했지만, 빈손으로 끝났다. 지난달 말부터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와의 별도 외교적 논의를 추진하고 있지만 푸틴 대통령은 미국 아니면 거들떠 보지 않는 자세로 응수하고 있다.

젤렌스키는 19일 대국민 연설을 통해 러시아 위협에 대한 뉴스에 "당황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그는 "전쟁은 8년째 계속되고 있다"며 "우리는 모든 것을 알고 준비가 돼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필요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들의 동요와 혼란을 잠재우기 위한 말이라 해도, 실제 대통령의 현실 인식이 그럴까봐 우려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군사전문가들은 러시아가 총공세를 개시할 경우 우크라이나 동부군은 30~40분밖에 못 버틸 것으로 내다본다. 지난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이후 미국과 나토가 25억 달러(약 3조원) 상당의 무기를 지원했음에도 우크라이나의 전력은 러시아와 비교 상대가 되지 못한다.

우크라이나 3면 포위한 러시아군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로한 컨설팅·뉴욕타임스]

우크라이나 3면 포위한 러시아군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로한 컨설팅·뉴욕타임스]

젤렌스키는 당선될 당시 지지자들을 향해 “실망시키지 않겠다. 우린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드라마 ‘국민의 종’에서 개인의 욕심 없는 정치, 당당한 외교를 펼치는 주인공에 반해 그를 뽑았지만 현실은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으로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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