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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신뢰받고 영향력 있는 ‘핵심통상국가’ 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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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박태호 광장국제통상연구원 원장·전 통상교섭본부장

박태호 광장국제통상연구원 원장·전 통상교섭본부장

디지털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상품과 서비스 못지않게 데이터의 국경 이동이 중요해지고 있다. 또한 기후변화 대응이 강화되면서 탄소배출 감축이 무역, 투자, 금융의 핵심 이슈로 부상해 기업활동에 큰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디지털 무역과 환경에 대한 다자 규범이 없어 당분간 혼란이 예상된다. 미국과 중국은 무역, 안보, 첨단기술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패권전쟁을 벌이고 있고 최근에는 중국의 강제노동 등 인권 문제가 제기되고 있어 양국 관계가 좀처럼 안정될 것 같지 않다. 이러한 과정에서 세계 주요 지역 및 국가들은 공급망 재편 등 편 가르기 압력을 심하게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에 변이 바이러스의 출현으로 세계 경제의 회복이 불투명해지면서 많은 국가가 보호무역 정책을 구사하고 있다. 이렇듯 세계 통상질서가 위협받고 있는데도 세계무역기구(WTO)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가 이어지고 있다. 앞으로는 안보, 기술, 환경, 인권, 보건 등 여러 분야가 국제통상과 복잡하게 얽혀 세계 통상환경은 더 불확실하고 불안한 모습을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불안한 세계 통상환경 지속 전망
한국, 반세기여 만에 G10국 진입
앞으로 국제통상 역할 더 중요해
통상수장, 국무위원 격상시켜야

우리나라는 코로나19로 인한 어려움에도 지난해 역사상 최고의 무역실적을 올렸다. 무역 규모가 1조2600억 달러 수준을 기록해 세계 8위 무역국이 되었고 수출 규모는 6400억 달러를 상회해 세계 7위 수출국 지위를 유지했다. 지난해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이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세계 10위에 진입했다고 발표했다. 1960년대 아시아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의 하나였던 우리나라가 무역을 바탕으로 기적적인 성장을 이루어 반세기여 만에 G10 국가가 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성장잠재력 하락, 저출산 고령화 문제, 미흡한 복지제도, 소득 양극화 심화 등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 우리나라가 앞으로 명실공히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어갈 필요가 있다. 부존자원이 부족하고 내수시장이 적은 우리나라로서는 수출, 해외투자, 외국인투자 유치 등을 중시하는 대외지향적인 성장전략을 계속해서 펼쳐나가야 할 것이다.

앞으로 전개될 세계 통상환경은 더욱더 복잡하고 어려워질 것이다. 특히 중국과 미국이 각각 우리나라의 제1, 제2 무역상대국인 만큼 미·중 통상갈등은 우리에게 큰 부담이다. 우리나라는 G10 국가가 된 만큼 이제는 보다 성숙한 방식으로 세계 통상환경에 대응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자본주의의 가치를 추구하며 다자체제의 비차별·상호주의 원칙을 존중한다는 것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즉 우리나라는 이러한 가치와 원칙에 바탕을 두고 통상정책을 추진함으로써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면서 궁극적으로 국제사회에서 신뢰받고 영향력 있는 ‘핵심통상국가’가 되어야 하겠다.

이와 같은 배경 아래 우리나라가 취해야 할 몇 가지 기본적인 입장을 살펴보자.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다자무역체제로부터 많은 수혜를 받은 만큼 WTO 중심의 다자무역체제를 강화하는 데 최선을 다 해야 할 것이다. 또한 환경보호 및 인권존중 등 새롭게 대두되는 사회적 가치를 능동적으로 수용하고 관련된 통상규범 제정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나아가 세계화 및 무역자유화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국내계층을 보다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포용적 통상정책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 미국과 중국에 대해서도 우리가 지향하는 가치와 원칙에 따라 일관된 대응을 해야 한다. 또한 미국, 중국, 동남아 등에 편중되어온 통상관계를 세계 전 지역으로 다변화하고 심화시킬 필요가 있다. 경제개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개도국들에 우리의 경제발전 경험을 맞춤형 형태로 전수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우리나라가 지속적인 성장을 하는 데는 국제통상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날로 어려워지는 세계 통상환경에 대처해 나가기 위해서는 앞을 내다볼 수 있는 포괄적인 통상전략 수립이 필요하다. 나아가 우리나라의 대외적인 위상과 협상력을 제고하고 국제통상과 관련된 여러 정부부처의 입장을 효율적으로 조율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측면들을 고려할 현재 우리나라의 통상교섭본부체제는 세계 8위 무역국으로서도 그렇고, 주요 무역국과 비교해 봐도 상당히 취약한 편으로 시급히 개편되어야 한다.

통상교섭본부를 별도의 정부부처로 신설하거나 특정 부처에 존속시키면서 승격시키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 다른 나라의 경우를 보더라도 이 중 어떤 것이 더 나은 제도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세계 대다수 국가에서 그렇듯이 통상조직의 수장은 정식 국무위원으로 격상되어야 한다. 따라서 통상조직을 특정 부처에 존속시킬 경우 동 부처에는 복수의 국무위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캐나다와 호주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승격된 통상조직에는 독립된 예산과 인사권이 주어져야 한다. 이렇게 통상전담 조직의 위상이 격상되면 통상분야에 관심 있는 우수한 인력이 모여들어 조직의 전문성도 높아질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가 ‘핵심통상국가’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