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김정탁의 인문지리기행

사대부 500년 기품 위에 피어난 독립운동의 꽃

중앙일보

입력 2022.01.21 00:34

업데이트 2022.01.21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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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가장 오래된 한옥 ‘안동 임청각’

눈이 내린 경북 안동 임청각 정경. 사진 왼쪽으로 낙동강과 옛 중앙선 철로가 보인다. 일제는 임청각 복판에 철도를 내며 가문의 맥을 끊으려 했다. 99칸 한옥 중 50여 칸이 사라졌다. [사진 김호태 이상룡 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눈이 내린 경북 안동 임청각 정경. 사진 왼쪽으로 낙동강과 옛 중앙선 철로가 보인다. 일제는 임청각 복판에 철도를 내며 가문의 맥을 끊으려 했다. 99칸 한옥 중 50여 칸이 사라졌다. [사진 김호태 이상룡 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가는 어디일까. 명문가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집안의 내력을 사람의 삶에 대입하면 어떨까. 공자는 훌륭한 삶을 15살에 뜻을 세우고(立志), 30살에 일어서고(而立), 40살에 유혹에 빠지지 않고(不惑), 50살에 하늘의 뜻을 알고(知天命), 60살에 귀가 순하게 되는(耳順) 것으로 규정한 바 있다.

집안도 이런 과정을 거치면 틀림없이 훌륭한 가문이 될 것이다. 공자의 기준은 사람의 삶으로 제한되므로 집안으로 확장하려면 그 이상의 기준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일어설 때와 물러날 때를 분명히 할 줄 아는 집안이 명문가가 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낙동강 정취 품은 고성 이씨 종택

도가의 여유와 유가의 절제 조화

18세기 때 허주, 학문·예술에 심취

20세기 석주, 항일 무장투쟁 지휘

일제는 집터에 철로 놓는 만행도

온갖 시련 이겨낸 명문가의 전통

이런 점을 감안하면 봄에 일어서고 여름에 번성해도 가을에 결실을 맺은 뒤 겨울에 사라지면서 땅에 뿌리를 내릴 줄 아는 집안이 명문가일 것이다. 이를 위해선 유가적 기운으로 가문의 토대를 이루고 노장적 기풍으로 마감할 필요가 있다. 집안에 유가적 기운이 넘치면 박제화되기 쉽고, 노장적 기풍이 강하면 허세에 흐르기 쉽다. 사람이 활동할 때 요구되는 철학이 유가라면 은퇴한 후에 요청되는 철학이 노장이라고 한다. 또 이름은 유가적이어도 호는 노장적으로 지어야 호칭의 완성도를 높인다고 한다. 그만큼 유가와 도가의 균형이 중요하다.

한국서예사에 큰 발자취 남겨

퇴계 이황이 쓴 임청각 현판. 그 아래는 일제에 맞선 고성 이씨 독립운동가들이다. 임청각에선 독립유공자 10명이 나왔다. [중앙포토]

퇴계 이황이 쓴 임청각 현판. 그 아래는 일제에 맞선 고성 이씨 독립운동가들이다. 임청각에선 독립유공자 10명이 나왔다. [중앙포토]

그렇다면 여기에 합당한 집안은 어디일까. 필자의 짧은 소견으론 안동 임청각(臨淸閣) 주인이었던 고성 이씨가 아닐까 싶다. 이 집안은 600년이란 긴 세월을 통해 유가와 도가의 균형을 잘 이뤄냈다. 먼저 임청각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세종 때 우의정과 좌의정을 11년이나 지낸 이원을 만난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 공민왕 시절 명재상이었던 문하시중 이암을 만난다. 이암은 송설체(松雪體) 대가로 한국서예사에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이로 인해 고성 이씨는 당대 최고의 가문을 자랑할 수 있었다.

이 집안이 안동과 인연을 맺은 건 이원의 아들 이증 때이다. 이증은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내려놓고 경상감사였던 장인을 모셨다. 이 과정에서 영남산과 낙동강의 경치에 매료되어 안동으로 이주를 결심해 사실상 고성 이씨의 입향조(入鄕祖·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조상)가 되었다. 그의 아들 이굉도 중종 때 개성유수를 사직하고 낙동강이 합류하는 와부탄 가에 귀래정(歸來亭)을 세우면서 이주를 본격화했다. 이 정자는 지금도 남아 있는데 너무나 아름다워 이중환의 『택리지』에 소개될 정도다. 그리고 그의 아우 이명이 임청각을 건립함으로써 안동 정착이 비로소 결실을 맺었다.

허주(虛舟) 이종악이 1763 년 임청각 풍경을 그린 ‘동호해람(東湖海纜)’. [중앙포토]

허주(虛舟) 이종악이 1763 년 임청각 풍경을 그린 ‘동호해람(東湖海纜)’. [중앙포토]

이때가 1519년인데 그 후 500년 가까이 임청각은 고성 이씨의 종택으로 자리를 잡았다. 임청각은 현재 가장 오래된 한옥인 데다 99칸 규모를 자랑해 문화재(보물)로는 물론이고, 건축학적으로도 큰 의미를 지닌다. 임청은 영남산과 낙동강의 ‘맑은(淸) 시냇가와 마주한다(臨)’는 뜻인데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마지막 부, 즉 ‘동쪽 언덕에 올라 조용히 읊조리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에서 따왔다. 그러니 고성 이씨 종가의 도가적 분위기는 임청각이란 이름에서 이미 잉태된 셈이다. 이런 가풍은 영조 때 허주(虛舟) 이종악(李宗岳)에 의해 꽃을 활짝 피운다.

허주는 드물게도 고서벽, 탄금벽, 화훼벽, 서화벽, 주유벽을 모두 갖춘 사람이다. 그의 고서벽은 그가 수집한 문고를 현재 고려대 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을 정도이다. 탄금벽은 낙동강을 주유할 때 서책·다기와 함께 거문고가 3대 필수품 중 하나였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화훼벽은 허주가 48세의 나이로 죽자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제문에서 ‘이 아름다운 화훼와 분재는 누구를 위해 봄을 맞이할 것인가’라는 애절한 심사로 표현되었다.

도가의 이상사회 완벽한 구현

석주(石洲) 이상룡. [중앙포토]

석주(石洲) 이상룡. [중앙포토]

또 허주는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 등 모든 서체에 능했다. 그래서 허주는 타고난 시인이자 서예가인 동시에 음을 아는 음악가이면서 아름다운 산천을 화폭에 담을 수 있는 화가였다. 한마디로 도가의 이상을 완벽히 구현해 낸 사람이다.

허주는 노태우 대통령 시절 활약했던 정치인 김윤환이 자신의 호로 사용해 유명해졌는데 원래는 이종악의 호였다. 물론 허주에게도 세상을 경륜해 보고자 하는 꿈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학식은 경세지학, 병가지학, 역사학에 두루 미쳤다. 그렇지만 그의 꿈을 실현할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영남인인 데다 남인에 속했기에 중앙권력으로부터 소외되어서이다.

그렇지만 그의 포부는 100년의 시간이 흐른 뒤 6대손에 의해 빛을 발할 수 있었다. 그 6대손이 임청각 마지막 주인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지금의 대통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이다. 석주도 6대조 할아버지 못지않게 경세지학, 병가지학, 역사학에 모두 밝았다.

석주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을 때 가장 먼저 만주 망명길에 올라 독립운동의 선두에 섰다. 그의 독립운동은 무장투쟁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장투쟁을 소홀히 하고 외교에 치중했던 상해임시정부의 초기 노선과 크게 비교되어서다. 석주는 만주에 망명하자마자 무관학교를 설립했는데 이 학교가 신흥무관학교로 지금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이다. 무관학교 설립과 운영에는 많은 자금이 필요하다. 그래서 석주는 임청각의 많은 재산을 학교에 쏟아부었다.

석주(石洲) 이상룡이 고국을 떠나는 아픔을 읊은 ‘거국음(去國吟)’. [중앙포토]

석주(石洲) 이상룡이 고국을 떠나는 아픔을 읊은 ‘거국음(去國吟)’. [중앙포토]

석주와 뜻을 같이한 대표적 경화사족 이회영도 그의 엄청난 재산을 여기에 기부했다. 청산리 대첩의 승리도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의 눈부신 활약으로 가능했다고 하니 석주의 병가지학이 더욱 빛을 발한다. 석주의 외아들 준형도 해방을 3년 앞두고 “하루를 살면 하루의 부끄러움만 더할 뿐”이라는 절명시를 남기고 운명을 달리했다. 절명시를 쓴 종이가 피에 얼룩져 지금도 보는 이들에게 숙연케 한다. 또 석주의 유일한 친손자인 병화도 7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뒤 출소했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47세의 나이로 일찍 죽었다.

임청각 식구들의 독립운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석주의 부인 김우락, 두 동생인 이상동과 이봉희, 그리고 이들의 아들이자 석주의 조카인 형국·운형·광민, 또 석주의 당숙인 이승화도 모두 독립운동에 나섰다. 석주의 처남 김대락과 매제 박경종은 물론이고, 외숙 권세연도 의병장으로 독립운동에 큰 족적을 남겼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가 서훈한 독립운동 관련 훈장과 포상을 가장 많이 받은 집안으로 기록된다.

독립운동가 가장 많이 배출해

임청각 주인들이 벌인 독립운동의 대가는 일제에 의해 혹독하게 치러졌다. 그 혹독함은 일제가 임청각을 어떻게 훼손했는지에 의해 잘 드러난다. 일제는 중앙선 철도를 놓으면서 임청각 가운데를 가로질러 철로를 깔아 유서 깊은 임청각을 반 토막 냈다. 이는 석주 가문을 모욕주기 위한 의도적 행동으로 보인다. 일제는 이를 위해 터널 3개를 뚫고, 필요 없는 교량까지 설치했다. 최근까지 이런 상태로 방치되다 임청각을 가로지르던 철로가 지난해 뜯기고 지금 복원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독립운동을 하면 삼대가 가난해진다는 말이 있다. 후손들이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다. 임청각 후손들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석주의 친손자들이 고아원을 전전했을 뿐 아니라 큰 손자와 둘째 손자는 25살과 20살의 꽃다운 나이에 죽었다.

그런데도 임청각 후손들에게 일제강점기는 결코 추운 겨울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도가적 가풍이 이 집안을 오랫동안 지배해와서다. 그래서 이 정도 시련은 충분히 견뎌낼 수 있다. 또 이 집안사람들은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추위가 매서울수록 봄의 따뜻함이 더하다는 것을 안다. 이 집안에 면면히 흐르는 이런 여유로움 속 강인함에 주목해 필자는 임청각 주인 고성 이씨를 최고의 명문가로 꼽았다.

김정탁
동아시아 사상의 관점에서 소통 문제를 30여 년 연구해온 커뮤니케이션 학자. 성균관대 교수를 지냈다.  『장자』와 『도덕경』 역·주·해·소를 책으로 펴냈고, 현재는 『논어』를 집필 중이다. 2004년 『예(禮)와 예(藝): 한국인의 의사소통사상을 찾아서』으로 한국언론학회 올해의 저술상을 수상하고, 학술원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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