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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플] “스타트업, 놀이터에 갇혔다” 규제 샌드박스, 3년의 그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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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산업 발전을 저해하는 규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19년 도입된 규제샌드박스가 3주년을 맞았다. 신기술 혁신 실험장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스타트업계에서는 일부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사진 셔터스톡]

신산업 발전을 저해하는 규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19년 도입된 규제샌드박스가 3주년을 맞았다. 신기술 혁신 실험장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스타트업계에서는 일부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사진 셔터스톡]

비좁은 임시 놀이터, 이 안에서만 놀아야 한다면 어린이가 성장할 수 있을까.
문재인 정부가 혁신 성장 지렛대로 강조한 ‘규제 샌드박스’가 도입 3주년을 맞은 가운데, 스타트업 업계에선 임시 놀이터 같은 제도를 개선해달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규제 샌드박스는 어린이들이 놀이터에서 자유롭게 놀며 성장하듯, 신기술 기업들이 일정 조건 하에 규제없이 사업을 테스트할 기회를 주자는 제도다.

무슨 일이야 

19일 국무조정실에 따르면, 지난해 말까지 3년간 규제 샌드박스 혜택을 본 신기술 사업은 총 632건으로 나타났다. 이 중 129건은 법령 개정 등 규제 개선으로 이어졌고 샌드박스에 참여한 기업들은 4조 8837억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국무조정실은 “심의를 통과한 기업의 90%가 ‘규제 샌드박스 제도에 대해 만족한다’고 답변했다”며 성과를 자신했다. 앞서, 문 대통령은 취임 2년 차인 2018년 초 "새로운 융합기술과 신산업의 변화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규제는 반드시 혁파해야 한다”며 규제 샌드박스 특별법 통과를 촉구했다.

부처별 규제 샌드박스 승인 현황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부처별 규제 샌드박스 승인 현황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규제 샌드박스 투자 유치 현황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규제 샌드박스 투자 유치 현황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규제 샌드박스, 뭐가 문제야 

규제 샌드박스로 일부 신기술 스타트업들의 숨통이 트이긴 했지만, '사업할 수 있는 것만 법이 정해주는' 포지티브식 규제는 여전하다. 국책 연구원도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지난해 12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공동 발간한 ‘디지털경제와 규제혁신’ 보고서에서 “한국형 규제 샌드박스가 신산업 혁신성장 지원을 위한 유연한 규제 생태계 조성에 공헌하고 있다”면서도 “그러나 양적 확장에 집중해 적절한 사후 관리가 이뤄지지 않는 등 실질적이고 체감 가능한 규제 불확실성 및 규제 공백 해소에 한계를 노출했다”고 평가했다. 현장에서도 정부와 다른 목소리들이 나온다.

규제 샌드박스란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가 출시될 때 일정 기간 동안 기존 규제를 면제ㆍ유예 시켜주는 제도다. 신기술이나 서비스가 국민의 생명ㆍ안전에 저해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임시허가’나 ‘실증특례’를 받아 사업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자는 것. 오래된 법령이나 규제가 신사업의 발전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시간을 벌어주고 그 동안 제도를 고치겠다는 취지로 도입됐다. 2019년 부터 과학기술정보통신부ㆍ금융위원회ㆍ산업통상자원부ㆍ국토교통부ㆍ중소벤처기업부가 각각 샌드박스를 운영하고 있고 국무조정실이 이를 총괄하고 있다.

임시허가는 법령 개정 전까지 시장 출시를 선제적 허용해 주는 방식으로 유효기간은 보통 2년+2년(처음 2년 후 1회 연장)이다. 사업의 영속성을 보장하기 위해 유효기간 만료 전까지 법령 정비가 안될 경우 임시허가 연장이 가능하다. 실증특례는 일정 기간 규제를 유예하고 제한된 범위 내에서 사업을 테스트할 수 있게 허용해주는 방식이다. 통상 2년이고 이후 2년을 연장할 수 있다.

한계① 파급력 너무 크면, 손 안 댄다?

스타트업계에선 “규제 샌드박스가 진짜 필요한, 파급력 큰 신기술엔 더 보수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기존 법령에는 존재하지 않는 기술을 토대로 사업을 하는 기업들이 수년째 허가 보류 상태에 묶여있다는 것. 이 때문에 정부가 샌드박스를 통해 상대적으로 풀기 쉬운 규제만 손댈 뿐, 근본적인 규제 혁신은 회피한다는 불신도 커지고 있다.

스타트업 ‘모인’은 2016년부터 블록체인 기반 해외 송금 기술을 개발했다. 중개 은행을 거치지 않고 블록체인 네트워크에서 암호화폐를 활용해 해외 송금하는 방식이라 수수료가 은행보다 저렴하고, 송금 시간도 짧아 사업성이 클 것이라 기대했다. 모인 측은 ‘블록체인-암호화폐 송금’ 방식을 허용해달라고 규제 샌드박스 도입 첫해부터 신청했지만, 4년째 부결 상태다. 자금 세탁에 악용될 수 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모인은 암호화폐에 대한 정부의 모호한 입장 탓에 규제 샌드박스도 외면한 사례로 꼽힌다. 지난해 9월 암호화폐 거래의 투명성을 높일 목적으로 특정금융거래정보법(특금법)이 시행된 후에도 모인에 대한 심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한계② 놀이터에서만 사업하라? 

규제 샌드박스 중에서도 실증 특례는 말 그대로 사업을 실제 시장에서 테스트할 기간을 허가해주는 방식이다. 그런데 스타트업들은 이 특례에 세트로 따라 붙는 '운영 요건'과 '부가 조건'을 지키다보면 사업성을 입증하기가 어렵다고 호소한다.

비좁은 놀이터 : 공유숙박 스타트업 ‘위홈’은 2019년 규제 샌드박스(실증 특례)를 통과했다. 내·외국인 관광객에게 일반 주택을 숙소로 빌려주는 플랫폼을 지향하지만, 현재는 서울 지역 숙소만 제공한다. '서울 지하철 1~9호선 역에서 1km 이내에 숙소가 위치해야'한다는 특례 부가 조건 때문이다. 수요가 늘고, 사업을 확대할 여력이 있어도 정부는 규제 샌드박스 놀이터를 넓히는 데 인색했다. 조산구 위홈 대표는 "위홈에 방을 올리고 싶다는 지방 숙소 호스트가 많아, 지방자치단체와 함께 수차례 정부에 부가 조건을 완화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소용 없었다"고 말했다.

공유숙박 스타트업 위홈은 규제 샌드박스를 통과했지만 여전히 서울 1~9호선 지하철역 1km 이내에서만 영업할 수 있다.

공유숙박 스타트업 위홈은 규제 샌드박스를 통과했지만 여전히 서울 1~9호선 지하철역 1km 이내에서만 영업할 수 있다.

돈 못 버는 사업 테스트 : 디지털 광고 업체 뉴코애드윈드도 ‘실증 특례의 벽’에 갇혀 국내 사업을 사실상 접었다. 창업자인 장민우 대표는 배달 기사들의 오토바이 배달통 겉면에 디지털 광고판을 설치해 음식점 광고를 노출하는 사업 모델로, 2019년 5월 실증 특례를 따냈다. 옥외광고물법 규제 대상에서 일단 제외돼, 불법 논란 없이 사업성을 검증할 기회였다.

그러나 특례의 효과는 거의 없었다. '광주 및 전남에서 오토바이 100대까지 적용할 수 있다'는 부가 조건 때문. 배달 기사 인건비와 보험료 등을 감안하면 오토바이 1대당 연간 5000만원 이상 투자해야 해 100대로도 수익을 내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테스트만을 위해 100대를 운영하자니 밑 빠진 독에 물붓는 격. 결국 장 대표는 17대로 테스트하며, 부가 조건이 완화되길 기다렸다. 그러나 관련 법령을 담당하는 행정안전부는 "테스트 기기 100대를 채우지 않았으므로 운영 규모를 더 키워줄 수는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결국 장 대표는 독일 딜리버리히어로(DH)에서 투자의향서(LOI)를 받아 UAE(아랍에미리트) 등 해외로의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장석영 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2차관이 2020년 4월 뉴코애드윈드를 방문해 '디디박스'를 살펴보는 모습. 디디박스는 오토바이의 배달박스 3면에 광고를 노출하는 방식이다. [사진 뉴코애드윈드]

장석영 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2차관이 2020년 4월 뉴코애드윈드를 방문해 '디디박스'를 살펴보는 모습. 디디박스는 오토바이의 배달박스 3면에 광고를 노출하는 방식이다. [사진 뉴코애드윈드]

한계③ 갈등 조율 대신, 뒤로 숨는 부처

정부는 실증 특례를 엄격하게 관리하는 이유로 ‘안정성’과 ‘기존 사업자들의 반발’을 든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새로운 산업을 제도권에 들이는 시도인 만큼 시민의 안전에 위협이 되지 않아야 하고, 사회적 갈등도 최소화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갈등을 조율해야할 정부가 손 놓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택시 배송 플랫폼 서비스인 딜리버리티. 앱을 통해 작은 물건을 급하게 배송하고자 하는 고객을 비어 있는 택시와 매칭해주는 서비스를 개발했지만, 규제 샌드박스 통과가 보류된 상태다.

택시 배송 플랫폼 서비스인 딜리버리티. 앱을 통해 작은 물건을 급하게 배송하고자 하는 고객을 비어 있는 택시와 매칭해주는 서비스를 개발했지만, 규제 샌드박스 통과가 보류된 상태다.

소(小)화물 택시배송 서비스 딜리버리티는 2019년 4월 ICT 규제샌드박스를 신청했지만 지금도 ‘보류’ 상태다. 고가의 명품이나 식음료를 택시로 배송하는 서비스를 기획했지만, 용달·퀵서비스 업계가 반대하고 나선 것. 기존 법령(화물자동차운수법, 여객자동차운수법)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업 모델이라 딜리버리티는 규제 샌드박스에 기대를 걸었지만, 국토교통부는 회사에 “이해 당사자들을 설득해오라”며 뒷짐을 지었다. 남승미 딜리버리티 대표는 "심지어 국토교통부 안에서도 택시 담당과 화물 담당 부서의 입장이 달라 조율이 안 되더라"고 말했다.

구태언 법무법인 린 변호사는 “현장과 소통하며 신산업·신기술에 대한 길을 열어줘야 할 부처들이 이해관계자와의 갈등을 이유로 강력하게 반대 의사를 표시하면 운영 부처에서 아예 해당 안건을 본 심의에 상정하지 않기도 한다”며 “미래를 밝힐 황금알을 낳을 거위들을 놓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앞으로는

전문가들은 이제 규제 샌드박스를 혁신할 때라고 입을 모은다. 하면 안 되는 것만 명확히 지정하는 ‘네거티브 규제’로 바뀌기 전까지는 규제 샌드박스를 고쳐 쓸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 판단도 있다.

지난해 12월 23일 서울 중구 서울중앙우체국에서 '제21차 정보통신기술(ICT) 규제 샌드박스 심의위원회'가 열렸다. [사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지난해 12월 23일 서울 중구 서울중앙우체국에서 '제21차 정보통신기술(ICT) 규제 샌드박스 심의위원회'가 열렸다. [사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 임시 허가 문턱 낮춰야 : 샌드박스 중에서도 ‘임시 허가’를 받아야 추후 원 규제가 개선되거나 폐지될 가능성이 크다. 관련 법령에 따라, 임시허가 기간동안 정부가 규제를 정비해야할 의무가 있기 때문. 그러나 스타트업들은 임시 허가의 문턱이 너무 높다고 말한다.

지난 3년간 규제 샌드박스 중 실증 특례는 502건으로, 임시 허가(89건)보다 5배 이상 많았다. 그나마도 절반은 대기업·글로벌 기업의 한국법인·병원 재단이 받았다. 김영규 코리아스타트업포럼 정책실장은 “사업에 제한이 많은 실증 특례 보다는 임시 허가 위주로 운영돼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스타트업 관계자는 “스타트업이 임시 허가로 신청해도, 접수처나 주무 부처의 권유로 실증특례로 승인되는 경우가 많다”며 “임시 허가를 늘려야 실제 규제 개선으로 이어지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실질적인 ‘사후 케어’도 필요 : 규제 샌드박스 통과후에도 실질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책임 보험이 대표적이다. 이용자 보호를 위해 대부분의 스타트업들은 시범 사업 기간에도 책임 보험에 가입해야 한다. 하지만 가입할 수 있는 보험 상품이 없다. 언제 접을 지 모를 스타트업의 사업을 위해 보험사들이 상품을 만들지는 않기 때문. 한 모빌리티 스타트업 관계자는 “보험사를 찾는 게 어려워 사업을 연장하는 경우도 많고, 어렵게 보험을 구하더라도 보험료가 비싸 스타트업으로선 꽤 부담이 된다”고 말했다. 구태언 변호사는 “혁신적인 시도를 하는 스타트업들이 현실적인 어려움을 겪는 만큼, 기술보증기금ㆍ신용보증기금 등 국가 기관이 보증하게 하는 방법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