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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일 새긴 골프공 하늘의 특별한 선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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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김현동 기자

김현동 기자

'스마일 퀸' 김하늘(34)이 골프공을 선물하는 것은 매우 소중한 것을 주는 것이다.

형편 어려워 볼 유난히 아껴 #"공 선물하면 모든 것 드리는 것" #유튜브, 골프방송으로 인생 2막

그가 중학교 3학년 때다. 전국 체전 대회장에서 아버지가 공을 사라고 지갑을 줬다. 프로숍에 가보니 공 한 줄이 3만원이었는데, 지갑엔 딱 3만원뿐이었다. 당시엔 지금보다 골프 볼이 비쌌다. 김하늘은 그냥 돌아왔다.

아빠가 “왜 공 안 샀냐”고 물었다. 김하늘은 “다른 공 두 알이 있는데 그걸로 쓸 수 있다”고 했다. 평소 그가 쓰지 않던 다른 브랜드의 공이었다. 선수에게 그 차이는 크다. 김하늘은 볼 하나로 2라운드를 다 쳤다.

김하늘은 “프로가 돼서 업체로부터 공을 후원받았을 때는 너무 행복하더라”고 했다. 그래도 골프볼에 대한 생각은 바꾸지 못했다.

KLPGA에서 뛰던 2009년엔 볼이 모자라 경기를 포기할 뻔한 일도 있다. 공을 4개밖에안 가지고 다녀서다. 그는 “프로 데뷔 후 몇 년간 흠집이 나면 공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못 했다”고 했다.

김하늘이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KLPGA 투어와 일본 투어에서 각각 8승과 6승을 거둔 김하늘은 지난해 말 은퇴했다.

그는 “프로 15년에 주니어 시절까지 치면 22년 취업한 거랑 다름없다. 조금만 마음이 풀어지면 성적이 바로 떨어지는 게 스포츠 세계여서 지치더라. 새로운 세상을 찾고 싶어 그만뒀다”고 말했다.

김하늘이 볼에 그려 넣었던 스마일. 김현동 기자

김하늘이 볼에 그려 넣었던 스마일. 김현동 기자

골프 대디 사이에 ‘골프 선수는 두 부류가 있다’는 농담이 있다. 부모님이 재테크를 잘해준 선수, 잘 못 한 선수다. 김하늘은 잘한 부류다.

그는 “재산이 얼마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작은 빌딩 2개에 경기도에 땅이 좀 있다. 부모님이 재테크를 잘 해주셨다”고 했다.

운동선수가 은퇴하면 우울증에 걸리기도 한다는데 그는 여유롭게 살고 있다.

김하늘은 “요즘 취미로 디저트를 만든다. 꼭 내가 먹는다기보다는 그냥 굽는 게 재미있다. 내가 다 먹으면 그 살 어떻게 감당하는가. 남들이 맛있게 먹어주는 것이 좋다”고 했다.

다른 운동도 해 볼 생각이다. 그는 “골프 때문에 시간도 없었고 골프 스윙 망가뜨리는 근육이 생길까 걱정도 했고, 다칠까 무서웠다. 그러나 이제 편하게 하려 한다. 날 풀리면 테니스도 해볼 거다”고 했다.

김하늘은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다. 모델 및 연기자 매니지먼트사와 계약도 맺었다. 골프 방송에도 출연 예정이다. 김하늘은 “연예인 지향은 아니다. 그러나 운동 쪽 예능에는 관심이 생기더라. 골프를 칠 때 웃으면서 하려고 했는데 방송을 하더라도 웃으면서 하겠다”며 미소를 지었다.

2007년 열아홉살에 KLPGA 투어에 데뷔할 때 김하늘은 예쁜 얼굴과 늘씬한 키, 밝은 미소가 눈부셨다. 당시 배우 김하늘이 톱스타였는데, 프로 골퍼 김하늘의 경기도 유난히 드라마가 많았다. 신인왕을 탄 김하늘은 KLPGA 투어를 비약적으로 성장시키는 주역 중 한 명이었다.

김하늘은 넉넉한 집안에서 자라지 못했다. 김하늘은 “모자란 공뿐만 아니라 여러 면에서 힘들었다. 그런데 내가 매일 웃고 다니니까 사람들이 그런 건 잘 모른다”라며 미소 지었다.

김하늘 가족은 낡은 봉고차를 타고 골프대회장에 다녔다. 박인비, 신지애 같은 막강 88년생 동기들 틈바구니에서 버티기도 쉽지 않았다. 포인트 50점을 따면 국가대표 상비군에 들어갔는데 경쟁이 심한 88년생들은 100점을 따도 안됐다.

국가대표나 상비군에 들어가면 태극마크뿐 아니라 공과 클럽을 받고 라운드 기회도 줬다. 김하늘은 받지 못했다. 그러나 김하늘은 늘 웃었고 가족은 화목했다.

김하늘은 2009년에 슬럼프에 빠졌다. 그는 “신지애가 미국으로 가고 서희경 언니와 나의 경쟁 구도가 됐는데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2011년 마지막 4경기를 우승, 준우승, 우승, 준우승으로 마무리하면서 대상을 탔다.

2012년 미국에 가려고 했다. 운이 나빴다. LPGA 투어 퀄리파잉 스쿨 시기가 전년도 우승한 대회 날짜와 겹쳤다. 당시 KLPGA 규정은 전년도 우승자가 대회에 불참하면 상금을 반납하게 되어 있었다. 고민 끝에 가지 않았다. 김하늘의 발목을 잡은 규정은 이후 폐지됐지만, 김하늘은 국내에 머물렀다.

김하늘은 2014년에 우승 없이 준우승을 6번 했다. 그는 “뭔가 도전이 필요했다. 그 당시에 내가 스물여섯이었는데 나이 많은 선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일본 투어 선수들을 보니 내 나이는 어린 축에 들더라. 그래서 가야겠다 생각했다”고 기억했다.

김하늘. 김현동 기자

김하늘. 김현동 기자

일본에서 그의 인기가 좋았다. 김하늘은 “일본에는 딱히 골프 채널이 없어 대회를 지상파 방송에서 틀어주기 때문에 골프선수들이 연예인이랑 비슷하다. 편의점, 길거리, 식당 등에서 나를 알아보더라. 행동거지를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외모 등 경기 외적인 것보다는 실력으로 인정을 받고 싶었다. 부모님도 그렇게 가르치셨다”고 했다.

김하늘은 최선을 다했다. 2015년 주니어 선수들을 대상으로 하는 최경주 전지훈련 캠프에 간 적도 있다. 지난해 겨울엔 마지막 불꽃을 피우고 싶어 하루에 다섯 시간씩 체육관에서 역기를 들었다. 그는 “너무 힘들어 트레이너 앞에서 울면서 못하겠다고 할 정도로 열심히 했다”고 기억했다.

볼을 아껴 쓰는 김하늘은 남는 볼은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했다. 그는 “볼에 이름도 쓰여 있고 하니까 받으시는 분이 좋아하신다. 나에게 공은 매우 소중한 거다. 내가 공을 드리면 모든 것을 다 드리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김하늘은 "은퇴 후에도 여러 분야에서 팬들에게 미소를 드리고 싶다. 볼처럼 소중한 것들을 팬들에게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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