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문화의 창

우리 인문학의 연구 환경에 대하여

중앙일보

입력 2022.01.20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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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요즘 대통령 선거판 돌아가는 것을 보고 있자면 대한민국이 과연 문화 선진국인가 싶다. 서로 비방하는 행태는 거의 인간성의 황폐화를 보여주는 것 같아 자괴감이 일어난다. 이런 판국에 인문학을 말한다는 것이 사치스러워 보일지 모르지만 품격이란 기본적으로 인문정신과 관계된다.

인문학은 인간으로서의 기본자세와 시대정신을 탐구하는 한 시대 지성의 상징이다. 인문대학이 없으면 종합대학이 될 수 없다. 인문학은 한때 ‘인문이 밥 먹여 주냐’는 냉대 속에서 ‘교양’ 정도로 생각되어 왔다.

인문학은 시대 정신의 상징
AI 시대에도 사고의 바탕
교수평가제 논문 중심 벗어나
저서에 높은 비중 두어야

그러나 컴퓨터, AI 등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오히려 이를 운용하는 사고의 기본은 인문학적 상상력이라는 각성이 일어났다. 이에 기존의 ‘교양 강좌’는 ‘인문학 강좌’라는 이름으로 자못 왕성히 열리고 있다. 카이스트, 포스텍 같은 유수한 과학기술대학에는 인문학 교수단이 따로 꾸려져 있다.

인문학의 기본 인력은 인문대학 교수들이다. 이들의 연구논문과 저술이 그 시대 인문학의 가장 큰 결실이다. 이에 나라에서는 교수 업적평가에서 논문 발표 수를 대대적으로 강화하였다. 대학마다 차이가 있지만 정교수가 될 때까지 조교수 5년, 부교수 6년의 11년 동안 1년에 2~3편의 논문을 써야 한다. 내가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과 비교하면 거의 2배 이상 강화되었다.

그 결과 많은 인문학 논문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이로 인해 우리 인문학의 연구 수준이 높아졌냐 하면 그렇지가 않다. 교수들은 부과된 논문 편수를 채우기 위해 테마를 세분화하거나, 충분히 연구가 심화되기 전에 급히 논문을 발표하기도 한다.

사실 인문적 상상력이 요구되는 연구논문을 이렇게 계량화시켜 평가하는 것 자체에 무리가 있다. 그러나 교육부와 매스컴의 대학평가에서 절대적 수치로 작용하기 때문에 당사자인 인문학 교수들은 차마 자기 입으로 요구하지 못하고 있다.

학자에게는 연령의 리듬이 있다. 박사학위를 막 취득한 30대에는 문제의식이 왕성하고, 40대의 조교수, 50대 전반의 부교수 시절에 학문적 열정이 최고조에 달하며 50대 후반, 정교수 시절에 원숙한 경지로 나아가는데 그 아까운 세월을 강요된 논문 편수 채우는 데 다 보내고 열정도 체력도 시들어가면서 정년퇴임을 맞이한다. 그래서 후배 교수들은 나에게 좋은 시절에 교수 생활을 했다고 부러움을 말하곤 한다.

교수업적은 저서로도 평가되고 있는데 그 평점이 크게 잘못 되었다. 논문 1편을 100점으로 치면서 일반학술저서도 100점이다. 게다가 개설서나 대중서는 50점이다. 이런 기준이라면 내가 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교수업적 평가에서 50점, 아니면 각주가 없다고 0점을 받게 된다.

사실 자기 저서를 갖는다는 것은 모든 인문학자들의 꿈이며 구체적인 사회적 실천이다. 그중 개설서와 대중서는 전문학술서보다도 훨씬 쓰기 어렵다. 연륜과 능력과 공력이 몇 갑절 들어가야 한다. 만약 저서에 높은 점수를 부여한다면 부진을 면치 못하는 인문학 출판계에 획기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인문학의 연구 인력으로는 교수 이외에도 박사학위 소지자들이 시간강사로, 연구소 연구원으로, 박물관 학예사로, 또 정부 각 기관에 퍼져 있다. 이들은 학회를 통하여 학문 활동에 동참한다. 그러나 우리 인문학의 학회들은 가난한(?) 회원들의 회비로 운영되기 때문에 정례 논문발표회에 수준에 머물고 좀처럼 국제학술대회 같은 거대 담론을 펼치지 못하고 있다.

한국학술진흥재단은 2009년부터 한국연구재단에 흡수되었는데, 2021년 기준으로 1년 예산 7조7000억원 중 인문사회 학술연구 지원액은 약 2700억원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 이공분야 연구개발비는 약 3조6000억원이다.

지난 해 포스코의 한 문화행사에서 최정우 회장을 만났을 때 인문학의 열악한 연구 환경을 설명하자 포스코재단에서 미력이나마 돕고 싶다고 하였다. 이에 내가 직간접으로 관계하는 한국미술사학회,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중앙아시아학회, 한국고간찰연구회 등 3개 학회와 2개 연구소에 각 2000만원 내지 1500만원을 연구비로 지원해 주었다.

수혜 받은 학회와 연구소는 석 달 가뭄에 맞는 단비 같다고 고마워하며 3개 학회는 대규모 학술대회를 열었고, 두 연구소는 책자를 발간하였다. 포스코재단은 지원금의 집행 내역을 보고는 올해도 계속 연구비를 지원하였다.

우리 인문학자들은 학문을 천직으로 삼고 오늘도 변함없이 연구하고 논문을 쓰고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 세상이 물구나무서기를 해도 그렇게 제자리를 지키는 학자들이 있어 우리 사회가 이만큼 성숙하고 있는 것이다. 제도가 정비되면 훨씬 더 발전할 수 있는데 이런 문제는 누가 해결해 줄 수 있는가.

오는 3월 9일에 선출되는 대통령은 인수위 때부터 학문 정책을 주요 국정과제의 하나로 삼아 우리가 기다리고 기다리는 ‘문화대통령’으로 큰 업적을 이루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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