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까지 퍼지는 젠더갈등
지난주 한장의 위문편지가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다. 한 여고생의 비아냥 섞인 위문편지가 ‘군 조롱’ 논란을 낳고, 여학생의 신상이 공개되며 사이버 불링으로 이어졌다. 일제의 잔재인 군 위문편지 쓰기를 폐지해달라는 청원이 올라왔고, 학교 측의 사과와 위문편지 폐지 검토로 상황은 정리돼 가는 듯하다. 그러나 아직도 인터넷에는 여학생 이름이 공개돼 있고, 딥페이크(불법 합성사진) 등 온라인 성폭력도 심각한 수준이다. 서울시교육청은 18일 피해 사례를 모아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한국사회의 뇌관인 ‘군’ 문제를 건드리며 우리 사회 첨예한 젠더 갈등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위문편지가 어쨌길래
“앞으로 인생에 시련이 많을 건데 이 정도는 이겨줘야 사나이가 아닐까요?~저도 이제 고3이라 뒤지겠는데 이딴 행사 참여하고 있으니까 님은 열심히 하세요. ~추운데 눈 오면 열심히 치우세요.” 서울 진명여고 학생이 쓴 위문편지였다. 노트 반 장을 북 찢어서 휘갈겨 썼다. 쓰고 싶지 않은 걸 억지로 쓰고 있고, 받는 이도 맘 상하라는 의도가 명백했다. 육군 병사가 이를 인터넷에 올리며 남초가 발칵 뒤집어졌다. 진명여고에 별점 테러를 하고 해당 여고생 신상털기, 사이버 폭력이 시작됐다. 차마 입에 담기 힘들 정도의 욕설과 성희롱이 난무했다. 인근 학원장이 편지 내용에 동의한 진명여고 학생을 학원에서 쫓아내는 일까지 벌어졌다.
여고생 위문편지 ‘군 조롱’ 논란
신상공개 등 사이버 불링 심각
학생 위문편지 실효성 돌아보고
젠더갈등 부추기는 정치 멈춰야
일단 아직도 학생들을 동원해 쓰는 위문편지 문화가 건재하다는 게 놀랍다. 주변에도 전부 “아직도 시대착오적인 위문편지를?”이란 반응이 대부분이다. 과거 군사정권 아래 국민동원 이벤트로 강요받았던 기억 때문이다. 나만 해도 “위문편지를 쓰라는데, 도대체 무슨 얘기를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란 내용으로 한 장을 간신히 채우던 기억이 있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SNS에 초등학생 시절 위문편지에 “~끝으로 군인 아저씨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썼었다고 털어놨다.
학생들의 집단 위문편지 쓰기는 1937년 중·일전쟁 때 조선총독부에 의해 시작됐다. 우리 사회 군사문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특히 성적으로 억눌린 젊은 병사들을 위한 섹시가수·걸그룹의 ‘위문’ 공연처럼 위문 문화 자체에 내재한 성차별적 요소, ‘성적 동원’의 의미도 있다.(병사들에게 여고생 위문편지가 가장 인기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미국 학교에서도 퇴역군인단체나 해외 파병 장병 등을 대상으로 펜팔을 하는 경우가 있으나 우리와는 역사적·문화적 맥락이 다르다.
실상은 이렇다. 과거처럼 집단동원령 내리듯 전국 학생이 일시에 쓰는 것은 아니고 학교별 선택 사항이다. 여고생만 쓰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다고 학생의 자율적인 선택은 아니다. 진명여고는 MOU를 맺은 군부대에 위문편지를 쓰면 봉사점수를 줬다. 쓰기 싫으면 봉사점수를 안 받으면 된다는 건, 현실에 맞지 않는 얘기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도 “학교 측은 강제가 아니라고 하지만, 학생들로서는 강제로 느껴질 수 있다”고 밝혔다. 1961년부터 위문편지 쓰기 행사를 해왔다는 진명여고는 ‘개인정보를 노출하면 심각한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가이드라인까지 마련했다. 종종 편지를 보낸 여학생을 찾고 싶어하는 병사의 글들이 SNS에 올라와서다. 펜을 든 10대 소녀에게 반발심이 생긴 게 무리가 아니다.
정의당 류호정 의원은 SNS에 “편지는 자율적으로 진심을 담아 써야 의미 있다. 교육부는 ‘학생들을 동원한 위문편지 쓰기 금지’ 지침을 내려달라. 국방부는 ‘이런 편지는 안 받겠다’ 말씀해달라”는 게시물을 올렸다. 이 영상에서 “위문편지가 군 장병의 사기 진작에 도움이 되느냐”는 류 의원의 질문에 한 육군 예비역 장병은 “몇 번 받아봤는데 모르는 학생에게 받는 위문편지가 제 전투력을 향상시키지는 않는다”고 답했다.
편지 자체는 경솔했다. 그러나 철없는 10대의 치기와 잘못으로 끝날 수 있는 사태는 ‘10대 페미의 군 조롱’으로 확대되면서 젠더 갈등에 불을 붙였다. 진명여고는 “부적절한 표현으로 행사 취지가 왜곡돼 유감”이라며 군에 사과했지만, 사이버 테러의 제물이 된 학생들에 대한 보호 조치는 게을리해 비판받았다. 아직 어린 미성년자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디지털 성폭력을 수수방관했다.
군이라는 뇌관
남초의 정서는 “전쟁 나면 우리가 목숨 걸고 지켜야 하는 여고생이 이럴 수 있냐”는 분노다. “전쟁 나서 위안부로 끌려가길”이란 악담이 쏟아졌다. ‘여자도 군대 가라’는 목소리도 터져 나왔다. 2030 남성의 주요 정서인 ‘우리가 피해자’ ‘역차별론’의 근간을 이루는 게 ‘청춘을 저당 잡히는 군 생활’에 대한 억울함, 손해 감정이다. 이번 위문편지 사건에 대한 젊은 남성들의 반응은, 2003년 부산대 여성주의 웹진 ‘월장’ 사태를 떠올리게 한다. 예비역 대학생들의 문화를 비판적으로 다뤘다가 “여자들이 군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사이버 테러를 당한 대표적 사건이다. 한국사회에서 군은 여전히 뜨거운 감자고, 젠더 갈등의 불쏘시개라는 점을 거듭 확인시킨다.
그런데 만약 군인 아닌 소방관이나 경찰관에게 쓰는 위문편지였다면 어땠을까. 준 강제적 편지쓰기에 대한 반감은 똑같지만, 위문 아닌 감사 편지로 받아들이며 이 정도의 감정적인 비아냥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남성들에게 군이 뜨거운 감자이듯, 툭하면 ‘여자도 군대 가서 고생하라’는 대응 논리 속에 여성들에게도, 심지어 10대 여고생에게도 군은 뜨거운 감자가 됐다는 얘기다. 군이 마땅히 받아야 할 사회적 존중이 설 자리는 사라져버렸다.
또 세상은 이대남·이대녀의 젠더 갈등에 주목하지만, 이미 젠더 갈등의 전선이 10대로까지 내려와 있다는 것도 확인해준다. 10대 청소녀 사이에서는 스쿨 미투(학교판 미투), 탈코르셋(꾸밈노동을 거부하는 것)으로 페미니즘 의식이 확산됐고, 이에 대한 10대 청소년의 백래시(반발)도 거세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온라인 남초·안티 페미니즘 유튜버들의 ‘혐오’ 정서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된 탓이 크다.
이대남의 뿌리, 10대 마초의 등장
『88만원 세대』로 유명한 우석훈 성결대 교수는 최근 이대남 현상을 분석한 『슬기로운 좌파생활』을 펴내며 이대남의 뿌리로 “10대 마초”의 등장에 주목했다. 출발은 일명 ‘중2병’이다. “특목고 트랙과 일반고 트랙이 결정되는 시기, 특목고 트랙에 진입하지 못해 집단 좌절을 체감한 남학생들이 주로 게임에 몰두하며 상실감을 달래는데, 남자끼리 모인 공간(남초·게임 커뮤니티)에서 ‘여성들한테 당하고 산다’는 열등감과 결합한 증오를 ‘여혐’으로 표출한다”는 진단이다. “이들이 대학에 입학할 땐 이미 ‘완성형 여혐’을 드러내는 단계에 도달해 있다”는 우 교수는 “젠더 갈등 넘어 젠더 전쟁이 폭발 직전”이고 “10~20대 남성의 극우화가 최소 향후 20년간 지속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치권은 젠더 갈등을 해결하기는커녕 정치공학적으로 이용할 생각뿐이다. ‘여성가족부 폐지’란 SNS 일곱 글자만으로, 잠시 빠졌던 2030 남성 지지율을 이틀 만에 회복한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 캠프에서는 젠더 이슈를 게임특위에서 다루기로 했다. 게임특위 위원장은 “페미니즘은 반헌법적 이념”이라고 공표한 하태경 의원이다. 젠더를 게임의 하위에 놓는 발상 자체가 충격적이다.(여가부를 ‘남혐’의 온상으로 꼽지만, 여가부 예산의 80%는 가족·청소년 예산이고 여성·성 평등 예산은 7%에 불과하다) 이재명 민주당 후보는 윤 후보와 거리를 두지만, 그 역시 이대남과 이대녀 사이에서 갈팡질팡 스텝이 꼬이곤 한다.
젠더 갈라치기 전략이 이번 대선에서 통하든 통하지 않든, 결론은 안 그래도 깊은 갈등의 골이 정치를 통해 더욱 회복 불능이 돼가고 있다는 점이다. 50일 후에는 새 대통령이 탄생한다. 누가 정권을 잡든 젊은 남녀가 공존하고 서로 존중하지 않는 사회에 미래가 있는가. 선거 이후가 진짜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