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미·중 전쟁과 코로나 2중고, 우리의 무기는 민주주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4면

세계사의 흐름과 한반도 정세

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한국의 역사는 세계사적 흐름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왔다. 특히 제국주의 시대 이후 모든 일국사는 세계사의 흐름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한반도에서의 흐름이 세계사와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는 듯한 모습을 보일 때도 적지 않았다.

1947년 이후 세계는 냉전적 구조가 본격화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열전이 일어났다. 1960년대 후반은 6·8혁명과 반전운동의 시대였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성찰은 전혀 없었고, 남북 간의 안보위기는 심화했다.

세계사적 격변기에는 뜻밖의 결과가 종종 나올 수 있어
1970년대 데탕트 시기에 격화된 남북 체제경쟁이 대표적
유신선언 50년 … 북한은 1인독재 강화하며 세계사와 역행
현재 국제질서도 불투명, 민주주의 원칙 굳게 지켜야

1990년을 전후하여 세계는 탈냉전 시대를 경험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남북 간의 긴장은 더 악화했다. 1993년 북핵 위기가 시작됐고, 한국 사회에서는 뒤늦게 매카시즘이 시작됐다. 친북·종북의 딱지가 붙었고, 선거 때마다 색깔 논쟁이 재현됐다.

베트남전 패배로 혼란에 빠진 미국

세계사와 한국 사회의 흐름이 서로 다르게 가는 것으로 보이는 대표적인 시기가 1970년대다. 1970년대는 데탕트의 시대였다. 미국은 중국의 문을 열었고, 소련과는 핵 감축에 합의했다. 동·서독이 서로를 정부로 인정하고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했으며, 1975년 유럽과 북미 국가들이 헬싱키 협정을 통해 국력과 관계없이 모든 나라의 주권을 존중한다고 선언했다.

반면 한국 정부는 1972년 유신선언을 통해 위태위태하게 유지해왔던 민주주의에 대해 사망선고를 내렸다. 북한은 사회주의 헌법 개정을 통해 1인 독재체제를 강화했다. 닉슨과 마오쩌둥의 마오타이주 건배를 무색하게 남북 간의 긴장은 결국 1976년 판문점 도끼 사건으로 귀결됐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왜 이렇게 서로 다른 현상이 나타났던 것일까?

문제의 시작은 베트남 전쟁이었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사용한 군사비는 2000억 달러 이상이었다. 한국전쟁의 3배, 제2차 세계대전의 4배에 달하는 액수다. 닉슨이 대통령이 됐을 때 미국 정부의 재정은 거의 파산 상태였다. 의회에서는 미국이 원조했던 한국과 태국, 그리고 필리핀의 군사비 적정 사용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사이밍턴위원회를 조직했다.

닉슨 행정부는 극단적인 조치를 시행할 수밖에 없었다. 1971년 달러만을 기축통화로 세계 경제를 이끌어갔던 브레턴우즈 체제의 중단을 선언했다. 미국으로 들어오는 수입상품에 대해 관세를 부과했다. 자국의 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세제 혜택을 실시했다. 마치 트럼프 행정부 정책의 1970년대 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유무역주의를 역행하는 정책이었다.

미국의 데탕트를 안보 위기로 인식

아시아의 상황은 미국과 달랐다. 오히려 베트남 전쟁의 특수로 인해 대부분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베트남 파병이 있었던 1965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의 성장률은 평균 9%를 상회했으며, 미국의 승인 아래 군수산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1965년부터 1970년까지 태국은 9.4%, 필리핀은 5.1%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한국과 필리핀, 태국은 당시 아시아에서 베트남에 전투부대를 파병한 국가들이었다. 베트남 전쟁 특수로 인해 각국 정부의 대중적 지지도는 높이 올라가는 가운데, 세 나라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독재정권의 강화 현상이 나타났다. 독재정권의 강화는 미국의 데탕트로 인한 안보위기가 명분이 됐다.

미국은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해외 주둔 미군의 감축과 철수를 추진했지만, 이는 공산주의와 대치하고 있었던 아시아 국가의 지도자들에게 위기로 다가왔다. 게다가 베트남에서 미군의 철수는 자국 내 미군기지의 축소, 그리고 전쟁특수 중단으로 이어져 독재자들의 대중적 인기에 큰 타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독재체제 강화한 한국·필리핀·태국

연쇄 반응이 시작됐다. 태국은 1971년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에서 친위 쿠데타를 단행했고, 미·중 접근 이후 중국과 소련에 손을 내민 민간 정치인이 축출됐다. 1972년 9월 필리핀에서는 마르코스가 계엄령을 선포했다. 마르코스는 신사회 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같은 해 10월 유신체제가 선포됐다.

아시아의 동맹국에서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정치적 움직임이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움직이지 않았다. 1973년 1월 18일 미 국무부에서 나온 문서에서는 미국의 대응에 대해 다음과 같이 권고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최근 필리핀과 한국에서의 민주주의 과오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삼가야 할 것이다. 마르코스나 박 대통령 같은 강력한 지도자들의 영구집권 문제는 필리핀이나 한국 국민이 결정할 문제이다.”

미국에 동맹국의 민주주의 체제는 대외정책에서 매우 중요하다. 백악관이나 국무성에서 독재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거나 때로는 경제제재와 군사적 개입을 하기도 했다. 2003년 이라크에서 대량학살 무기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 ‘민주주의의 확산’을 군사개입의 명분으로 삼았고, 현재 미·중 갈등에서도 중국의 인권 문제가 중요한 이슈로 제기되고 있다.

미국은 왜 개입하지 않았는가?

한국 현대사에서도 미국은 한국 정부가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는 정책이 나올 때마다 개입했다. 1952년 부산 정치파동 때에는 이승만 제거 계획을 세우기도 했고, 1958년 2·4 보안법 파동 때에는 한국 정부에 직접 경고를 했으며 4·19혁명에서는 시민의 손을 들어주었다. 1963년 민정 이양 번복 때 원조 중단 경고와 함께 케네디 대통령이 직접 친서를 보내 민정 이양을 끌어냈다.

이는 미국이 동맹국에 대한 경제적·안보적 지원에 대해 미 의회의 동의가 필요하며, 독재국가를 지원한다는 야당과 언론의 비판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미국은 왜 유신의 선포에도 조용히 있었을까?

미국에는 더 이상 개입할 수 있는 힘과 명분이 없었다. 닉슨 행정부는 1971년 한국에서 주한미군 1개 사단을 전격 철수했다. 한국이 베트남에 파병하고 있는 동안 주한미군을 감축할 때 한국 정부와 사전에 논의하겠다는 전임자 존슨 대통령의 약속이 완전히 무시되는 순간이었다. 사전 논의 없이 주한미군 감축은 박정희 정부에 일방적으로 통고됐다.

미국 정부의 생각은 미국과 중국이 손을 잡고 남·북한을 교차승인함으로써 긴장을 완화하면 한반도에서도 남북 간의 긴장이 완화될 것이고, 이는 곧 주한미군의 철수를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시나리오에 근거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군사비를 절약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기대를 비웃듯이 남한에서는 유신체제를 선포했고, 북한에서는 1인 독재를 위한 헌법을 개정하며 긴장이 더 강화됐다.

이후 박정희의 유신체제는 끊임없이 미국 의회와 언론에서 비판의 대상이 됐고, 급기야 1976년 코리아게이트와 같은 거대한 스캔들로 비화했다. 그러나 미국은 개입할 수 없었다. 당시 주한미국 대사였던 하비브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책은 ‘앉아서 바라보는 것(Wait and see)’이었다.

2022년에 다시 돌아보는 1972년

1972년 유신체제 선포와 미국의 불개입은 미국의 데탕트 정책이 가져온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였다. 그 결과 미국은 1970년대 내내 동맹국들 내에서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한국에서의 상황은 그나마 양반이었다. 이란과 니카라과의 반미 혁명, 그리고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해 미국은 아무런 손을 쓸 수 없었다.

이렇게 보면 유신체제의 선포는 미국이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였지만, 동시에 세계사적 전환기에서 나타난 빈틈을 미국의 동맹국 지도자들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 이용한 결과였다. 한국뿐만 아니라 태국에서도 필리핀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나타났다. 전쟁특수로 국내 기반이 탄탄해진 지도자들이 시민들이 손 쓸 틈도 없이 독재를 강화하는 강수를 둔 것이다. 결과적으로 필리핀은 14년, 한국은 15년이 지나서야 민주주의를 회복할 수 있었다.

지금 한반도 주변에서 또 다른 큰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미·중갈등이 그 한 축이라면, 코로나19 팬데믹 역시 미래 세계질서를 더욱 불확실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가 또다시 나타날 수도 있다. 현 시점에서 1972년의 상황을 다시 돌아본다면, 우리의 대응이 그 결과를 다르게 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민주주의의 원칙을 굳건히 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한국 사회의 성장동력이며, 북한과의 경쟁에서 한국이 가진 가장 큰 무기다. 이는 1961년 5월 16일 아침 주한 유엔군사령관이 윤보선 대통령에게 했던 말이다. 또한 동맹국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국민의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이 굳건하다면, 기대하지 않았던 상황이 오더라도 또 다른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