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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혜리의 시선

MBC의 후회, 이재명의 눈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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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낙연 전 대표 지지자가 지난해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올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당시 경기지사)의 욕설 녹음 파일. 욕설 파일들은 이 후보 측 요구로 줄곧 삭제됐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 부인 김건희 씨 녹취 파일 공개를 계기로 대대적으로 일반에 공개됐다. 유튜브 캡처

이낙연 전 대표 지지자가 지난해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올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당시 경기지사)의 욕설 녹음 파일. 욕설 파일들은 이 후보 측 요구로 줄곧 삭제됐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 부인 김건희 씨 녹취 파일 공개를 계기로 대대적으로 일반에 공개됐다. 유튜브 캡처

"내가 비위가 약한가 봐. 어휴, 힘들어. 더이상은 도저히. 아주 입에 걸레를 물었네. 그나저나 이재명은 왜 칼로 쑤시고 구멍 어쩌고 그런 얘기를 자꾸 반복해서 하는 거야?"
대학생 아들이 지난 18일 일반에 공개된 A4 용지 78장 분량(녹음 파일 34개 160분 길이)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녹취록을 휴대전화로 보다가 전체의 4분의 1도 읽지 못한 채 전화를 소파에 내려놓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요즘 애들은 친한 친구끼리 웬만한 욕은 일상으로 하는 줄 알았더니 그 또래 눈에도 참기 어려운 수준이지 싶었다.
앞서 지난 16일 MBC가 민주당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방송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부인 김건희 씨 녹취 방송을 보고는 "사람이 (품)격은 없네"라고 한마디 했던 아들 눈엔, 통화하기 싫다는 친형과 형수에게 집요하게 전화를 해서는 보통 사람이라면 입에 담기 쉽지 않은 극강의 욕설을 퍼붓는 집권 여당 유력 후보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었던 모양이다. 실제로 세어보니 이런 도 넘은 표현은 13페이지까지 열 번 넘게 등장하고, 쌍시옷 들어간 욕설은 셀 수조차 없다. 아들을 멀미나게 한 상스런 욕설은 물론이거니와 대장동 사건으로 구속된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과 관련해 "내 측근이 아니다"라던 이 후보의 주장과 배치되는 발언들, 그리고 회계사인 친형 재선 씨를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키려고 성남시장 재직 시 산하 기관장을 여러 차례 동원한 과정 등도 놀라웠다. 녹취록만으로는 실체적 진실을 모두 알기 어려우나 이 후보가 직접 내뱉은 표현과 내용만으로도 적잖은 국민에게 충격을 준 건 분명하다.
이런 세간의 반응을 의식해서인지 이 후보는 녹취록이 공개되자마자 "사과드린다"고 몸을 낮추며 잠시 눈물을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사과만 한 건 아니다. 오히려 민주당은 '음성 파일 유포는 후보자 비방죄 등 선거법 위반에 해당한다'며 즉시 고발 조치하고 강력히 대응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이 파일을 공개한 고(故) 이재선 씨 측 장영하 변호사뿐 아니라 전 국민을 겁박한 셈이다. 불과 며칠 전 김건희 씨 통화 녹음 파일 방송 여부로 세상이 시끄러울 때 "국민의 알 권리"라며 "본방 사수"를 독려하던 민주당이 판세가 역전되니 이제 와서 딴소리다. 이런 코미디가 없다.

지난 16일 서울역 대합실 스크린을 통해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 부인 김건희씨의 통화 녹취를 다룬 MBC '스트레이트'가 방영되고 있다. 뉴스1

지난 16일 서울역 대합실 스크린을 통해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 부인 김건희씨의 통화 녹취를 다룬 MBC '스트레이트'가 방영되고 있다. 뉴스1

돌이켜보면 이미 몇 년 전부터 찔끔찔끔 돌아다니던 장장 160분에 달하는 이 후보 욕설 녹취록 수십 개가 한 번에 풀리게 된 과정 그 자체가 코미디다. 친정부 성향의 유튜브 매체인 '서울의 소리' 직원이 상대(김건희) 동의 없이 6개월 동안 52차례 통화하며 녹음한 7시간 45분 분량의 음성 파일을 MBC에 통째로 넘긴 게 이번 소동의 시작이었다. 자칭 "기자"라면서 "누나, 동생"하며 주고받은 사적 대화를 통째로 다른 언론사에 넘긴 것도 기이한데, 더 한심한 건 MBC다. 입만 열면 공정 방송을 내세우면서 일개 유튜브 매체의 하청 방송을 자청했으니 하는 말이다. 만약 MBC가 방송에서 주장한 것처럼 "(국민의힘의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알 권리 차원에서 공적 관심사에 해당하는 내용만 신중히 방송"한 것이라면 단순히 녹취 파일을 받아서 공개하는 데 그칠 게 아니라 반드시 이를 확인하고 검증하는 취재 과정이 있었어야 했다. 그렇게 파고 다듬어서 공익적 가치가 있는 보도로 만들었어야 했다. 하지만 취재는 전무했다. "김건희 씨 측에 반론을 요구했으나 서면 답변밖에 받지 못했다"는 변명만 구색용으로 내보냈을 뿐이다.
본격적인 코미디는 따로 있다. 바로 민주당의 기대를 배반한 방송 내용이다. 정청래 의원은 MBC의 방송 예고 후 페이스북에 "왜 이리 시간이 안 가지"라며 "본방 사수!"를 외쳤다. 고민정 의원도 페북에 "오랜만에 본방 사수해야 할 방송이 생겼다"고 시청을 독려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유족 소송 대리인인 정철승 변호사는 "가공할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다는 데 내 손모가지를 건다"고 득의양양했다.

김건희 씨 통화 내용을 담은 MBC 방송 전후의 정철승 변호사 페이스북. [페이스북 캡처]

김건희 씨 통화 내용을 담은 MBC 방송 전후의 정철승 변호사 페이스북. [페이스북 캡처]

그리고 결과는 우리가 아는 그대로다. 방송 후 정철승 변호사의 "판도라의 상자가 아니었네"라는 페북 한 줄이 이번 코미디의 한 줄 요약이다.  오죽하면 문제의 유튜브 채널 서울의 소리 대표가 라디오에 나와 "MBC에 준 거 후회한다"고 했을까.
봉인됐던 욕설 파일의 빗장을 연 건 민주당이 비난히는 국민의힘이나 장영하 변호사가 아니다. 김건희 씨를 최서원(최순실)과 엮어 비선 프레임을 짜려던 민주당과 MBC다. 뒤늦게 이 후보가 눈물을 흘려봐야, MBC가 블라인드(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에서 부끄럽다고 난리 쳐봐야 소용없다. 참, MBC가 진정 부끄럽지 않은 공정 방송으로 거듭나려면, 민주당이 알 권리를 존중한다는 진정성을 확인하려면 방법이 있긴 하다. 같은 방송에서 이 후보 욕설 파일을 제대로 된 취재와 곁들여 내보내는 거다.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