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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이 다시 쓰는 ‘대러시아’의 기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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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강혜란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강혜란 국제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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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은 모두 유럽에서 가장 큰 국가였던 고대 루스의 후손이다.” 지난해 7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발표한 장문의 에세이 서두다. 제목은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의 역사적 통일에 관하여’. 고대 루스란 몽골 후예 칸국 지배를 받기 전 동유럽의 키예프를 중심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 일대에 형성됐던 루스인들의 국가를 말한다. 한마디로 현재 각각 주권국가인 이들이 ‘뿌리’로 보면 남이 아니란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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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은 지난해 말 연례 기자회견에서 “우크라이나가 역사적으로 러시아 땅”이라고도 했다. 동부 돈바스 지역과 크림반도가 구소련 체제 와해 당시 우크라이나에 속하게 된 것일 뿐 “이 지역 주민들은 자신을 러시아인으로 여겨왔다”면서다. 지난 2000년 집권 이후 ‘넘버 원’으로 통치 중인 푸틴의 집요한 ‘대러시아주의’를 엿볼 수 있다. 이러니 2014년 친러시아 독재정부가 우크라이나인의 손에 의해 축출된 일(유로마이단)은 대수롭지 않을 게다. 루스인들의 후예가 미국·유럽 등 서방의 간계에 의해 찢기고 있고, 이 같은 반러시아를 극복해야 한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푸틴의 에세이는 “우크라이나에 있는 러시아인들이 자신들의 뿌리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러시아를 적이라고 믿도록 강요받고 있다”며 이에 맞설 정당성을 강변한다.

우크라이나 국경 3면에 10만 이상 러시아 대군이 집결하고 ‘전쟁의 북소리’가 다가오는 중이다. 지난주 세 차례 회담이 무위로 돌아가자 미국은 오는 21일 러시아와 막바지 담판을 예고했다. 전망이 밝진 않다. 푸틴의 진짜 속셈이 무엇인지 국제관계 전문가들도 오리무중이다. 서방은 강력한 경제제재를 예고했지만 직접적인 군사 개입과는 거리를 둔다. 결국 푸틴의 탱크가 국경을 넘는다면 맞서야 할 몫은 우크라이나에 있다.

푸틴은 ‘고대 루스’를 강조하면서 2014년 크림반도 때 같은 무혈입성을 기대할지 모른다. 오히려 동부 돈바스 내전으로 이어진 지난 8년은 우크라이나의 기류를 변화시켰다. “2014년 러시아의 침략은 2차 대전 이후 어떤 사건보다 우크라이나의 정체성과 주권을 확고히 하는 데 더 큰 역할을 했다”고 파이낸셜타임스가 최근 지적했다. 역사는 비대칭적 국력에서 희생자적인 유대가 민족 정체성을 강화해왔음을 보여준다. 사실 푸틴이 소환하는 ‘한 뿌리’ 당시 모스크바 공국은 스스로 대러시아를 자처했고 소러시아(우크라이나)를 신민으로 거느렸다. 이를 흐리며 ‘대러시아’를 운명적인 형제국가인 양 강압하는 것은 21세기식 제국의 팽창일 뿐이다. 우크라이나의 주권이 이에 어떻게 답할지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