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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예영준 논설위원이 간다

"권력 나눌수록 권위 높아져, 제왕적 대통령제와 결별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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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황태연 교수가 18일 동국대 연구실에서 공자의 정치철학이 서양 근대국가의 형성에 미친 영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황태연 교수가 18일 동국대 연구실에서 공자의 정치철학이 서양 근대국가의 형성에 미친 영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아주 오래된 상식, 그래서 도전할 수 없는 진리인 것처럼 여겨져 온 관념의 틀을 깨려는 학자가 있다. 정치철학자 황태연 동국대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자유와 평등의 이념에 기초한 민주공화정 체제, 이를 지탱하는 자유시장경제와 복지제도, 이를 구현하기 위한 관료제 등은 서양 고유의 것이 아니라 동양의 공자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황 교수는 주장한다. 우리가 채택한 헌법, 체제, 시장 등은 모두 공자의 사상이 서천(西遷)해 지금의 형태로 만들어진 뒤 환류 내지 역수입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근대화 과정에 커다란 저항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볼테르, 흄 등 근대를 잉태한 서양의 계몽주의자의 90% 이상은 공자 숭배자였고, 영국 민주주의의 기초를 만든 윌리엄 템플, 공화국가 미국을 만든 제퍼슨, 프랭클린 등은 ‘공자 광팬’이었다. 제퍼슨 등에 의해 미국 헌법에 종교의 관용 조항 등 공자 철학의 영향이 혼입되었고, 연방대법원 청사 꼭대기에 구약 영웅 모세와 함께 공자 입상이 새겨져 있는 것도 그런 연유로 설명이 된다는 것이다.

‘공자 정치철학자’ 황태연 교수가 본 한국정치 #마크르스 연구에서 공자로 선회 #폭력투쟁은 정치판을 피바다로 #상대 존중하는 관용의 정치 필수 #공자는 전쟁 일으킨 자 용납 안해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 추진해야 #총리는 내치, 대통령은 외교 전념

‘서양 민주공화정도 공자서 비롯’
 2001년부터 공자를 천착하기 시작한 황 교수가 본격적으로 연구 성과물을 내놓기 시작한 것은 대략 10년 전부터다. 우선 저작의 방대함에 압도된다. 그가 펴낸 공자 관련 저서는 모두 16부작 30권이다. 2020년판 『공자와 미국의 건국』은 상ㆍ하권 1786쪽인데 활자는 일반적인 단행본보다 더 작다. 이 책들을 조금만 펼쳐보면 황 교수의 논지가 희망적 상상의 소산이거나 허황한 가설과 비약으로 쌓은 모래탑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방대한 문헌을 섭렵하고 치밀하게 검증한 뒤 촘촘하게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가령 이런 식이다. 황 교수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 프랭클린과 제퍼슨이 남긴 저술과 편지, 일기 등을 샅샅이 읽고 그들의 독서 목록과 장서 목록까지 조사했다. 그랬더니 프랭클린은 『중국철학자 공자의 철학과 도덕』을 탐독하고 ‘13개 덕목 리스트’를 작성해 자신의 수신(修身) 지침으로 삼으며 일일삼성(一日三省)을 실천했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그가 발행하던 주간신문에 공자 경전의 발췌문을 연재한 것도 알아내 내용을 원전과 비교 분석했다. 물론 황 교수의 논지는 대단히 논쟁적인 데다 기존 상식을 뒤집는 것이어서 짧은 시간 안에 검증과 평가가 이뤄지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황 교수를 인터뷰한 것은 동서고금을 두루 섭렵한 학자의 눈으로 보는 한국 정치의 현주소와 과제를 들어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현실정치에도 참여한 적이 있다. 김대중 정부의 탄생 원동력이었던 DJP연합도 그의 아이디어를 DJ가 수용한 것이다.  황 교수는 원래 독일에서 7년 반 동안 마르크스 원전을 파고들어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0년대 초반 그는 진보 진영 또는 변혁운동을 추구하는 진보진영의 이론 매체에 자주 등장했다. 그가 마르크스 연구자에서 공자 연구자로 변신한 지적 여정의 편력은 지금의 한국 사회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황태연 교수의 공자 관련 저서.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황태연 교수의 공자 관련 저서.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범인의 눈에 마르크스와 공자는 대척점에 선 인물로 보인다. 연구 테마를 바꾼 계기는.
 “학문적 관심의 출발은 이상국가, 즉 좋은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란 물음이었다. 나는 마르크스 공부를 대충이 아니라 아니라 끝장까지 했다고 자부한다. 마르크스의 두 가지 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나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정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수월하거나 효과적이라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봤다. 반대로 폭력 사용이 효과적이지 않은 데도 그렇게 하는 건 바보짓이 된다. 철저하게 공리주의(功利主義)에 입각한 것이다. 여기에 윤리는 없다. 폭력이 용인되는 것은 정당방위에 국한되어야 하는데 마르크스 원전 43권을 다 뒤져도 그런 말은 단 한 줄도 없다. 폭력혁명론의 기원을 레닌에서 찾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오독(誤讀)이다. 폭력혁명론의 원조는 마르크스고 책임도 마르크스에 있다. 또 하나 계급투쟁의 문제다. 인류 사회에 계급투쟁이 일어난다는 설명은 역사적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계급투쟁을 해야 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게 바로 세상을 바꾸는 것은 투쟁밖에 없다는 투쟁 유일주의와 투쟁 만능주의로 이어진다. 사실은 마르크스뿐 아니라 서양 역사철학과 사회과학 전반의 문제이기도 하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얘기한 홉스나 ‘권력투쟁이 정치의 본질’이라고 한 막스 베버에서 보듯 투쟁을 빼면 사회과학이 성립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동양철학으로 선회한 것인가.
 “사실 마르크스의 공산사회나 공자의 대동사회나 목표는 비슷하다. 다만 이상사회에 도달하는 방법론이 정반대다. 폭력투쟁으로 도달하려 하면 피투성이 정치판이 되고 예(禮)와 의(義)로 도달하고자 하는 정치는 상대방을 존중하는 관용의 정치가 된다.”

‘천하를 영유하되 관여하지 않는다’
 황 교수는 젊은 시절 그토록 천착하던 마르크스를 '의미 있게 틀린 사람'이라 표현했다. '틀린 것'은 보지 않고 '의미'만 찾는 일각의 지적 풍토를 경계하는 말로 들렸다.
 공자 철학의 관점에서 볼 때 한국 정치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발견된다. 바로 제왕적 대통령제다. 『논어』  태백편에 ‘천하를 영유하되 천하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有天下而不與)’는 말이 나온다. 이는 17세기 영국에서 템플이 말했듯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사상으로 이어져 군주의 권능을 제한하고 내각제로 발전했다고 황 교수는 설명한다. 제왕적 대통령은 ‘유이불여’ 사상을 거스르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개헌을 주창해 왔는데 어떤 내용인가.
 “대통령이 행정권을 갖도록 돼 있는데 이를 바꿔야 한다. 총리는 국회 다수당의 지명으로 뽑고 행정수반으로 못을 박자는 것이다. 대통령은 외교ㆍ국방ㆍ대북정책의 세 가지를 전업으로 하게 한다. 그러면 외교안보정책을 초당적으로 운용하면서 국가원수로서의 존엄과 귄위를 가질 수 있다. 지금 국민 40% 조금 넘는 지지로 대통령이 되는데 당선되는 순간부터 조금만 잘못하면 반대당의 비판으로 권위는커녕 만신창이가 되지 않나. 분권을 하면 권력은 나누지만 권위는 더 높아진다.”
 -총리가 각료 제청권을 갖게 되어 있는 헌법 규정만 잘 지켜도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를 줄일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착각이다. 시쳇말로 대통령이 자기 말 안 따르면 총리를 잘라버리면 그만 아닌가. 우리 헌법에는 ‘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여 내각을 총괄한다’라고 되어 있다. 다시 말해 헌법상 총리의 위상은 대통령의 보좌관이다.”
 -현실적으로 개헌이 어렵다면 차기 대통령은 차선책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공자 사상의 핵심은 관용과 중용이다. 지금 우리나라 정치는 보수 진보 간 갈등이 너무 심하고 상대방을 배척한다. 대결정치는 반드시 정상화해야 한다. 새 대통령 당선자는 ‘다음 정권을 구성할 인재를 천하에서 구한다’는 인사원칙을 공개 선언하고, 장관들을 좌우ㆍ보혁진영을 가리지 않고 ^명망 있는 중도적 인물 ^정치적 비중 있는 진보ㆍ보수인사 ^실력 있는 실무형인사들 등 다양한 인물군으로 구성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 대북정책의 오류
 -문재인 정부는 어떻게 평가하나.
 “경제정책이 잘못됐다는 건 다 아는 얘긴데 내가 보기에 대북정책도 잘못됐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은 햇볕정책이 아니라 달빛정책으로 변질했다. 대통령 성씨(Moon)를 빗대는 말이 아니라, 2차 대전 직전 영국의 챔벌레인이 히틀러에게 했던 것과 같은 유화정책 일변도란 얘기다. 대화의 끈을 놓으면 안 된다는데 때론 끊을 수 있어야 한다. 북한이 극초음속 미사일을 쏘면 우리는 대비책으로 선제공격의 준비가 되어 있다고 칼날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걸 호전적이라고 몰아붙이는 게 잘못이다. 원래 햇볕정책은 도발을 막을 힘과 의지를 갖고 그 바탕 위에서 북한과 교류 협력하는 것이다. 대결정책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지금 정책으로도 안된다. 공자는 전쟁을 반대했지만 불인자(不仁者), 즉 전쟁을 일으키려는 자는 용납해선 안 되며 싸우면 이겨야 한다(戰即必勝)고 했다. 그래서 경전에 수없이 나오는 말이 유비무환(有備無患)이다. ”
 -그럼 북한 핵에 어떻게 대비해야 하나.
 “한미원자력협정을 개정해서 플루토늄 재처리 권리를 가져야 한다. 핵확산금지조약(NPT)에는 핵주권에 차별이 없다고 되어 있다. 일본에 재처리 권리가 있고 우리에게 없는 것은 차별이다. 재처리 권리를 갖게 되면 유사시 우리 기술로 수개월 안에 핵무기를 만들 수 있다. 이것만으로 북한에 대한 억지력이 된다. 핵균형이란 어차피 서로 상상을 통해 심리적 공포를 느끼고 견제하는 것이다.”

예영준 논설위원

예영준 논설위원